차 례
서 문“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19-20).
1. 교회 생활의 모든 새로운 길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곧, 제자들이 파스카 저녁에 위층 방에서 체험한 대로 부활하신 분과의 만남을 새롭게 체험하는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번 시노드 총회에 참여하면서 그분의 자비가 우리를 감싸고 그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귀 기울이면서 성령 안에서의 대화를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의 현존, 곧 성령을 주시어 서로 다름의 조합인 일치를 당신 백성 안에 계속 북돋워 주시는 그분의 현존을 느꼈다.
2. 우리는 부활하신 분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로마 6,3)을 기억한다. 우리는 새 생명을 통하여 변화되었으나 영원히 그분 인성에 새겨져 있는 그분 상처의 표지들을 알아보았다. 이 상처들은 또한 우리의 죄 때문에 많은 형제자매의 몸에서 계속 피 흘리고 있다. 주님을 향한 시선은 역사의 비극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관통하는 고통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해 준다. 곧, 전쟁으로 겁에 질린 아이들의 얼굴, 어머니들의 울부짖음, 산산이 부서진 많은 젊은이의 꿈들, 참혹한 여정에 맞닥뜨린 난민, 기후 변화와 사회적 불의의 피해자를 알아보게 해 준다. 그들의 고통은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이 비극적인 사건들에 가족과 동포들과 함께 직접 연루된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우리 한가운데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가 총회에 모인 기간에도 수많은 전쟁이 계속 이어져 죽음과 파괴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고 양심을 메마르게 만들었다. 우리는 폭력과 증오와 보복의 논리를 규탄하고 대화와 형제애와 화해의 논리를 증진할 것을 다짐하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거듭 표명하시는 평화에 대한 호소에 동참한다. 참되고 항구한 평화는 가능한 것이고, 우리가 함께 이러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사목 헌장 1항)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기쁨과 슬픔이 되었다.
3. 2021년 교황 성하께서 이번 시노드를 개막하신 이래, 우리는 점점 더 풍요롭고 풍성한 결실을 얻는 여정을 걸어왔다. 우리는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7)을 알아차리고자 주의 깊게 귀 기울여 왔다. 이 여정은 우리 교구들 안에 있는 하느님 백성의 광범한 자문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가 종합 의견서들과 작업 문서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재개하는 대화의 순환 과정 안에서 국가별, 대륙별 단계로 이어졌다. 두 회기에 걸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의 거행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선교 활력을 위하여 교황 성하와 온 교회에 우리 경험에 대한 증언과 우리 식별의 결실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여정의 모든 단계마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각’의 지혜가 돋보였다. 이 여정을 한 단계 한 단계 거쳐 가면서, 우리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을 주제로 한 ‘2021-2024년 시노드’의 중심에는,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사명에 봉사하기 위하여 헌신하며 주님께 충실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교회의 기쁨과 쇄신에 대한 부르심이 있음을 이해하였다.
4. 이 부르심은 세례로 받은 공통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고, 한 분이신 아버지와 한 분이신 주님과 한 분이신 성령 안에서 존재하고 일치를 찾는 교회가 속한 맥락의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례 받은 모든 이에 대한 부르심이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는 복음 선포의 주체이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선교의 주역이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선교하는 제자들이기 때문이다”(국제신학위원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La Sinodalità nella Vita e nella Missione della Chiesa], 53항). 이처럼 시노드 여정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들의 대표들이 시노드 참석으로 증언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하고 가시적인 일치를 향하여 우리를 이끈다. 일치는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 안에서 누룩처럼 소리 없이 커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온 누리를 위한 일치의 예언이다.
5. 시노드 여정 전체는 교회의 성전(聖傳)에 뿌리를 두고 공의회 교도권의 빛 안에서 전개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실 세상과 교회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다. 신자들의 일상생활, 모든 민족과 문화 안에서 교회들의 경험, 거룩함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 그리고 신학자들의 성찰은 그 씨앗이 싹트고 자라나는 토양이 되었다. 2021-2024 시노드는 그 씨앗의 활력을 끊임없이 끌어내면서 그 잠재력을 발전시킬 것이다. 시노드 여정은 실제로 공의회가 교회를 신비이자, 복음을 듣는 데에서 비롯되는 지속적인 회개를 통하여 거룩함으로 부름받은 하느님 백성이라고 가르친 것을 실현하여 나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노드 여정은 공의회를 더욱 수용하는 참된 행위로서, 공의회의 영감을 연장하고 오늘날 세상을 위한 그 예언적 힘을 다시 발휘한다.
6. 우리는 이 여정에서 피로감, 변화에 대한 저항감을 느끼기도 했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식별을 수행하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려는 유혹도 경험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지극히 온유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로 마음을 정화하며 계속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2회기를 참회의 밤 기도로 시작하며 이를 깨닫게 되었다. 이 참회 예식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죄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세상의 죄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하여 전구 기도를 올렸다. 평화를 거스르고 피조물, 토착민, 이주민, 미성년자, 여성, 가난한 이들을 해치며 경청과 친교를 저해한 우리의 죄명들을 불러 보았다. 이를 통하여 시노달리타스를 위해서는 참회와 회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 자비의 성사를 거행하며 우리는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음을 경험한다. 마음의 완고함을 극복하고 친교에 열린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용서와 화해를, 곧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증인일 뿐인 그 순수한 은총인 용서와 화해를 모든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자비로운 교회가 되고자 한다.
7. 우리는 2021년에 시작된 시노드 여정의 첫 열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소중한 이러한 열매들은 가정, 본당, 협회와 운동 단체, 소공동체, 학교, 수도 공동체의 삶 안에서 누룩처럼 자라나, 성령 안에서의 대화, 공동체 식별, 성소 은총의 나눔, 사명에 대한 공동 책임의 실천을 북돋우고 있다. 시노드를 위한 본당 사제 국제 모임(2024년 4월 28일 – 5월 2일, 로마 사크로파노)은 이러한 풍성한 경험의 소중함을 확인하고 여정을 다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교회를 환대와 희망과 기쁨의 장소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많은 공동체와 신자들의 목소리에 감사하고 기뻐한다.
8. 총회 제1회기는 또 다른 열매들을 거두었다.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1회기 「종합 보고서」에는 교회의 삶에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주제에 주의를 기울였다. 교황 성하께서는 국제 자문 단계를 마무리하며 이 주제들을 모든 대륙의 목자들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 그룹들에 맡기시고 시노달리타스 방법으로 작업할 것을 당부하셨다. 이미 심층 연구 작업이 시작된 교회의 삶과 사명의 분야들은 다음과 같다.
① 동방 가톨릭 교회들과 라틴 교회의 관계의 몇 가지 측면
②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기
③ 디지털 환경에서의 선교
④ 사명을 수행하는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 「사제 양성 기본 지침」(Ratio Fundamentalis Institutionis Sacerdotalis)의 개정
⑤ 특정 직무 형태에 관한 몇 가지 신학적 교회법적 문제들
⑥ 사명을 수행하는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 주교들, 축성 생활자들, 교회 단체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서들의 개정
⑦ 사명을 수행하는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 주교의 모습과 직무의 일부 측면들(특히 주교 후보자 선정 기준, 주교의 사법 임무, 사도좌 정기 방문의 본질과 과정)
⑧ 사명을 수행하는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 교황 사절의 역할
⑨ 교리적, 사목적, 윤리적으로 논쟁이 되는 문제들에 대한 공동 식별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 기준과 시노달리타스 방법론
⑩ 하느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진 교회 일치 여정의 결실에 대한 수용
이 연구 그룹들 외에도, 교회법 규범에 필요한 개혁을 위하여 교황청 교회법부와 합의하여 교회법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중혼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사목 동행과 관련된 식별은 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주교회의 연합회(SECAM)의 심포지엄에 맡겨졌다. 이러한 연구 그룹들과 위원회들의 작업은 실행 단계에 들어섰고, 제2회기의 작업을 풍성하게 하였으며, 교황 성하께서 사목과 통치의 선택을 내리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9. 시노드 과정은 이번 시노드 총회로 끝나지 않고 그 이행 단계를 포함한다. 우리는 총회 대의원들로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선교사로서 시노드 이행 단계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헌신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여긴다. 우리는 모든 지역 교회가 (본당, 축성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 신자 단체, 교구, 주교회의, 교회들의 연합 등) 다양한 교회 실재들 안에 가시적인 시노달리타스 회심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과 양성 과정들을 확인하면서, 자문과 식별이라는 시노드 방법론으로 자신의 일상 여정을 계속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의 교회 생활 참여와 시노달리타스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진전에 대한 평가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주교회의들과 자치(sui iuris) 교회 시노드들에게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로 성장해 나가는 여정에 동반하고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와 연락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낌없이 인력과 자원을 할애하여 줄 것을 제안한다(「주교들의 친교」[Episcopalis Communio], 제19조 1-2항 참조). 우리는 주교대의원회의 사무처에 연구 그룹들의 작업 방식이 시노드적인 특징을 가지는지에 관하여 계속 감독할 것을 요청한다.
10.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의 결실로서 교황 성하와 교회들에 제시하는 이 「최종 문서」는 지금까지 수행된 모든 단계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는 제1회기에서 나타난 몇 가지 중요한 수렴들, 두 회기 사이의 몇 달 동안 교회들에서 보내온 의견서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2회기 동안 성령 안에서의 대화 덕분에 무르익은 내용들을 모두 모은 것이다.
11. 「최종 문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 명시된 관점에서(30항 참조) 선교에 대한 부르심은 또한 각 개별 교회와 온 교회의 회심에 대한 부르심이라는 인식을 표명한다. 본문은 총 다섯 부로 구성된다. 제1부는 ‘시노달리타스의 심장’이라는 제목으로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빛을 비추어 주고 자양분이 되는 신학적 영성적 토대들을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1회기에서 부각된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공감된 이해를 다시 언급하고 이에 관한 영성적 예언적 관점을 발전시킨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감정, 표상, 생각의 전환은 사목 활동과 선교 활동의 전환과 함께 이루어진다. 제2부는 ‘배 위에서 함께’라는 제목으로, 소명과 은사와 직무가 서로 어우러져 사명을 형성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우는 관계들의 회심을 다룬다. 제3부 ‘그물을 던져라’는 교회적 식별, 의사 결정 과정, 투명성과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의 문화라는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 실천에 할애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선교적 변모’의 길을 시작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고, 이를 위해서는 참여 기구들의 쇄신이 시급히 필요하다. 제4부는 ‘풍성한 고기잡이’라는 제목 아래, 한 장소에 정착하는 경험이 깊이 변화하고 있는 시대에 교회 안에서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유대 관계와 은총 교환을 새로운 형태로 증진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어서 제5부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우리가 달성하여야 하는 첫 단계를 내다보게 해 준다. 곧, 시노달리타스 사명에 관하여 하느님 백성 모두가 양성받도록 돌보는 것이다.
12. 「최종 문서」는 부활에 관한 복음 이야기들에 따라 전개된다. 파스카 새벽에 무덤으로 달려간 이야기, 위층 방과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분의 발현 이야기는 우리의 식별에 영감을 주고 우리의 대화에 자양분이 되었다. 우리는 성령의 파스카 선물을 간구하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고 모두 함께 따라야 할 길을 보여 주시도록 간청드렸다. 이 문서를 통하여 시노드 총회는 교회의 구성적 차원인 시노달리타스가 이미 많은 교회 공동체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 왔음을 인정하고 증언한다. 이와 동시에, 따라야 할 길들, 행동으로 옮겨야 할 실천 사항들, 탐구하여야 할 지평들을 제안한다. 교회를 시노드로 소집하신 교황 성하께서는 주교들의 사목적 돌봄에 맡겨진 교회들에게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로마 5,5) 희망으로 우리의 여정을 계속하는 방법을 알려 주실 것이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요한 20,1-2).
13. 부활 아침에 우리는 세 제자, 곧 마리아 막달레나, 시몬 베드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를 만난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주님을 찾는다. 희망의 새벽에 저마다 고유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랑에 이끌려 가장 먼저 무덤에 간다. 이어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전하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가 무덤에 간다. 사랑받는 제자는 젊음의 힘으로 먼저 달려가 통찰력 있는 눈으로 살펴보지만, 지도 임무를 받은 연장자에게 길을 양보하는 법도 알고 있다.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에 짓눌려 있던 베드로는, 언젠가 자신을 교회 안에서 자비의 봉사자가 되게 해 줄, 바로 그 자비로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정원에 남아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주님께서는 제자 공동체에 가서 당신의 부활을 알리라고 그를 보내신다. 따라서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의 상호 의존이 시노달리타스의 심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다.
14. 교회는 역사상 결정적인 사건, 곧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증언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부활하신 분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시고 당신 영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자유의 원천이고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의 토대이며 하느님의 참얼굴과 인간의 궁극적 운명을 드러내는 계시이다. 복음서들은 파스카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공허함, 두려움과 의심과 죄의 어두움을 인식하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가 찾아 나서는 사람들은 실제로 누군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며 찾고 있음을, 자신이 용서받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파견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의 백성, 일치의 성사인 교회
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이 흘러나온다. 이 정체성은 성덕으로의 부르심으로, 그리고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도록 모든 민족을 초대하는 선교에의 파견으로 실현된다(마태 28,18-19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입혀 주시고(갈라 3,27 참조)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요한 3,5-6 참조) 바로 그 세례로부터,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생활은, 우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시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그 원천과 지평이 있다.
16.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교회 헌장 9항).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은 친교와 일치의 원천인 성찬례를 통하여 계속해서 자양분을 얻는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주님 몸의 성사로 길러진 교회는 주님의 몸을 이룬다(교회 헌장 7항 참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은총으로 활력을 얻는 교회는 성령의 성전이다(교회 헌장 4항 참조). 실제로 바로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를 영적 집을 짓는 데 쓰이는 살아 있는 돌이 되게 하시어 교회에 생기를 주시고 교회를 건설하신다(1베드 2,5; 교회 헌장 6항 참조).
17. 시노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상황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부족, 언어, 민족, 국가가 한데 모여 하느님 백성이 되는 “영적인 맛”(「복음의 기쁨」, 268항)을 경험하였다. 하느님 백성은 세례 받은 이들의 단순한 총합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백성은 시간 안에서 아직 순례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 교회와 친교를 이루고 있는, 시노달리타스와 사명의 역사적 공동체적 주체이다. 개별 교회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다양한 맥락 안에서, 하느님 백성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증언한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면서 지상의 모든 민족과 함께 걸어가며 그들의 종교와 문화와 대화하고 그 안에 있는 말씀의 씨앗을 알아보고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과 세례로 이 하느님 백성과 한 몸이 된 우리는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교회 헌장 68항)이신 동정 마리아와 사도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믿음을 증언한 이들,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성인들의 지지와 동반을 받고 있다.
18.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인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친교’(communio Fidelium)는 ‘주교들의 친교’(communio Episcoporum) 안에서 드러나는 ‘교회의 친교’(communio Ecclesiarum)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 “교회는 주교 안에 있고, 주교는 교회 안에 있다.”(성 치프리아노, 「서간집」[Epistulae], 66,8)는 아주 오래된 원칙에 근거한다. 다채로운 친교에 봉사하도록 주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와(마태 16,18 참조) 그 후계자들을 세우셨다. 베드로 직무에 힘입어 로마 주교는 교회 일치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교회 헌장 23항)가 된다.
19.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배척받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다”(「복음의 기쁨」, 197항). 따라서 교회의 마음속에도 그들이 있다.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해 주신 그리스도의 얼굴과 육신을 만난다(2코린 8,9 참조).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그리스도론적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 가난한 이들은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알아 뵙는다(「복음의 기쁨」, 198항 참조). 고통받으시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을 은총으로 받은 구원의 선포자이자 복음의 기쁨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흔히 신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하게 되도록 부름받았다. 또한 교회는 그들이 성령께 받은 은사들을 함께 알아볼 수 있도록 가난한 이들에게 귀 기울이도록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의 주역으로 여기도록 부름받았다.
20. “인류의 빛은 그리스도이시다”(교회 헌장 1항). 비록 교회의 얼굴이 인간 조건의 나약함과 죄의 어두움으로 얼룩져 있기는 하여도, 이 빛은 교회의 얼굴에서 빛난다. 교회는 인류 가족의 유대와 관계와 형제애의 효과적인 누룩이 되라는 은사와 책무를 그리스도께 받아(선교 교령 2-4항 참조) 인류 여정의 의미와 목적을 세상에 증언한다(사목 헌장 3.42항 참조). 오늘날 사람들이 저마다 공동 운명의 일부이자 주역이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참여의 위기가 팽배하고 행복과 구원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이 지배하는 시대에, 교회는 이러한 책무를 맡고 있다. 교회의 소명과 예언자적 봉사(교회 헌장 12항 참조)는 온 인류를 자유와 친교 안에서 당신께 결합시키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증언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교회 헌장 3항)이고 “지상에서 이 나라의 싹과 시작”(교회 헌장 5항)인 교회는 온 인류와 함께 걸어가며 인간 존엄성, 공동선, 정의, 평화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헌신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1코린 15,28) 되시는 그날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교회 헌장 5항) 갈망한다.
하느님 백성의 성사적 뿌리
21. 교회의 시노드 여정을 통하여 우리는 소명들과 은사들과 직무들의 다양성은 하나의 뿌리를 지닌다는 사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1코린 12,13). 세례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토대이다. 세례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 됨이라는 가장 위대한 선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성령 안에서 예수님께서 성부와 맺는 바로 그 관계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이 존엄성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고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그분께 결합하게 해 준다. 우리의 영광스러운 이름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는,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우리가 형제자매로 함께 걸어가게 하는 은총이 담겨 있다.
22. 세례의 힘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 특히 믿음과 사랑의 생활로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증거를 널리 전한다”(교회 헌장 12항). 세례 때 받은 성령의 도유는(1요한 2,20.27 참조) 모든 믿는 이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을 갖게 해 준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 감각’(sensus fidei)이라고 부른다. 이는 세례 받은 이들이 성령 안에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게’(계시 헌장 2항) 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신적 실재들과 어떤 공동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에서 흘러나오는 자질이, 교회의 친교 안에서 계시의 진리에 부합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세례 받은 이들 전체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표명할 때에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다(교회 헌장 12항 참조). 신앙 감각의 행사를 여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시노드 과정의 각 단계의 결합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이는 언제나 교회 생활의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목자들의 식별과 연관된다. 신앙 감각은 ‘신자들의 합의’(consensus fidelium)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자들의 합의’는 어떤 특정한 교리나 실천이 사도 신앙에 속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에 확고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Sensus Fidei nella Vita della Chiesa], 2014.6.10., 3항).
23. 세례를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앙 감각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세례성사는 시노달리타스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교회 일치의 토대이기도 하다. “교회 일치의 길이 시노달리타스적이듯, 가톨릭 교회가 따르고 있는 시노달리타스의 길은 교회 일치적이고 교회 일치적이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아시리아 동방 교회 총대주교 마르 아바 3세에게 전하는 연설, 2022.11.19.). 교회 일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적 쇄신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상처에 대한 기억을 치유하고 참회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복음적 사랑의 정신으로 형제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까지 요구된다. 시노드 총회에서는 우정과 기도, 삶의 나눔,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고 공동의 집을 돌보겠다는 다짐을 함께 나누며 다양한 교회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이 외치는 빛나는 증언이 울려 퍼졌다. 세계의 적지 않은 지역에서 무엇보다도 피의 교회 일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곧, 다양한 교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목숨을 바치고 있다. 순교를 통한 그들의 증언은 그 어떤 말보다도 더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일치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24. 그리스도교 입문 안에서가 아니라면, 곧 주님께서 교회의 직무와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우리를 파스카 신앙으로 이끄시고 삼위일체적 교회 친교에 동참하게 해 주시는 그 여정 안에서가 아니라면, 세례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여정은 이 길을 걷는 연령에 따라, 동서양 전통의 서로 다른 고유한 강조점에 따라, 각 지역 교회의 특수성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양상을 띤다. 그리스도교 입문은 매우 다양한 소명과 교회 직무를 접하게 한다. 그러한 소명과 직무를 통하여 교회의 자녀들과 함께 걸어가며 그들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는 교회의 자비로운 얼굴이 표현된다. 자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의구심과 질문에 응답하면서 교회는, 각 사람이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통하여 가져오는 새로움으로 풍요로워진다. 이러한 사목 활동의 실천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흔히 이를 온전히 인식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시노달리타스의 첫 번째 형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25. 그리스도교 입문 여정에서, 견진성사는 증언을 위한 특별한 성령의 부으심으로 믿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계셨고(루카 4,1 참조)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거룩하게 되시어 복음을 선포하러 가셨다(루카 4,18 참조). 바로 이 성령께서 하느님께 소속됨을 나타내는 인장으로서 또 거룩하게 하는 도유로서 믿는 이들 위에 부어지신다. 이러한 까닭에, 오순절의 은총을 세례 받은 사람과 공동체의 삶 안에서 구현시키는 견진성사는, 선교의 불길에 이끌려 세상의 길들로 나아갈 용기와 모든 민족과 문화의 이해를 받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교회의 경이로움을 새롭게 하는 데에 큰 가치를 지닌 선물이다. 모든 믿는 이는 성령께서 각자에게 풍성히 나누어 주시는 은사들을 기쁘게 받아들여 겸손과 창의적 주도성을 가지고 이 은사들을 활용하여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데에 헌신하도록 부름받았다.
26. 성체성사의 거행, 특히 주일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모이고 만나는 일차적이며 근본적인 형태이다. 성찬례 거행 안에서 ‘교회의 일치가 드러나고 이룩된다’(일치 교령 2항 참조). 모든 신자의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전례 헌장 14항) 안에서, 다양한 직무자의 존재 안에서, 주교나 신부의 집전 안에서 가시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드러난다. 그 안에서 사명을 위한 모든 이의 분화된 공동 책임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찬례로부터, 성사적 신비의 일치와 전례 전통들의 다양성, 거행의 일치와 성소, 은사, 직무의 다양성 등 일치와 다원성을 결합하는 법을 배운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조화가 획일적이지 않고 교회의 모든 선물이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성찬례보다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모든 성찬례 거행은 아직 완전하지도 가시적이지도 않은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일치에 대한 염원과 호소의 표현이기도 하다. 주일 성찬례 거행을 원하지만 불가능한 곳에서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말씀의 거행을 중심으로 모인다.
27. 쉬낙시스(synaxis)와 시노도스(synodos), 곧 성찬의 모임과 시노드 회합은 서로 긴밀한 연관 관계가 있다.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양쪽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약속(마태 18,20 참조)이 실현된다. 시노드 회합들은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와 결합되어 계심을 기념하는 행사들이다. 성령께서는 성찬의 모임과 시노드 회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이 이루는 일치를 보장하신다. 시노드 회합과 마찬가지로,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의 모임에서 당신 몸인 교회와 결합되어 계심을 보장해 주신다. 전례는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계약에 응답하는 것이다. 시노드 회합도 시대의 징표 안에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마음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동일한 말씀을 경청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그 뜻을 식별하는 회중이 그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전례와 시노달리타스의 연관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 문화와 전통의 다양성 안에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거행 방식을 채택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전례 거행이 시노달리타스를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성찰을 맡는 특정 연구 그룹의 설립을 요청한다. 전례 거행 안의 설교와 신비 교육의 핵심 안에서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교리 교육의 발전에 관하여도 다룰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의 의미와 차원들
28.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와 ‘시노달레’(synodale)라는 용어는 시노드 안에 모이는 고대부터 지속된 교회 관행에서 유래한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전통들 안에서 ‘시노드’라는 용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게 하여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된 제도들과 행사들을 언급하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모든 형태는 함께 모여 대화하고 식별하고 결정하는 형태로 통합된다. 최근 수년에 걸친 경험 덕분에, 이 용어들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 이에 관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용어들은 하느님의 집이자 가족인 교회, 사람들과 더 가깝고 더 관계적인 교회를 향한 열망과 점점 더 연관되어 왔다. 시노드 과정을 거치면서 이 「최종 문서」의 근간이 되는 시노달리타스의 의미에 관한 수렴이 무르익었다. 곧, 시노달리타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온 인류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이는 사명을 지향하기에 교회적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함께 모이는 것, 상호 경청, 대화, 공동체적 식별, 성령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표현하는 동의 형성, 그리고 분화된 공동 책임성 안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수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시노달리타스가 교회의 구성적 차원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더 잘 이해하게 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1항 참조). 간단히 요약하자면, 시노달리타스란 더 참여적이고 선교적인 교회가 되기 위한, 곧 더욱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며 모든 남녀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한 영적 쇄신과 구조 개혁의 길이라 할 수 있다.
29. 그리스도와 교회와 인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 안에서 우리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 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자비로운 교회의 특성이 충만한 빛을 밝히고 있음을 본다. 동정 마리아는 실제로 경청하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대화하며 동반하고 식별하며 결정하고 행동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성모님께 경청의 기술, 하느님 뜻에 주의를 기울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명,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알아차리는 능력, 길을 나서는 용기, 도움을 주는 사랑, 찬미의 노래, 성령 안에서의 기쁨 등을 배운다. 따라서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에서 교회의 활동은 마리아의 보살핌의 연장이다”(「마리아 공경」, 28항).
30. 더 자세히 말해서,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삶의 세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가) 무엇보다 먼저,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삶과 사명을 특징짓는 고유한 방식이다. 이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본질은 함께 걸어가는 것,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고자 주 예수님께서 소집하신 회중으로 모이는 것임을 드러내 준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과 작용 방식 안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한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은 공동체적으로 말씀을 경청하고 성찬을 거행하는 것, 친교의 형제애를 이루는 것, 그리고 하느님 백성 전체가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직무와 역할을 구별하며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고 공동 책임을 지는 것을 통하여 실현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70항 가).
나) 둘째, “시노달리타스는, 이렇듯 다양한 차원의 유비적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그리고 교회법적 의미에서 가장 특수하고 한정된 의미에서 교회 구조와 교회 절차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와 절차들은, 성령께 귀를 기울이며 그 이끄심에 따라 걸어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도록 부름받은 교회의 권위 있는 식별을 위한 것이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70항 나).
다) 셋째, 시노달리타스는 “관할 권위로 그리고 교회 규율로 정해진 특정 절차에 따라서 교회가 소집되는 시노드 사건들이 정확히 일어나는 것을 지칭한다. 그 사건들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참여하여, 로마 주교와 합의체적이고 교계적인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의 주재 아래, 개별 교회와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차원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여정과 특정 문제들을 식별하고, 교회의 복음화 사명을 완수하려는 결정과 지침들을 취하려는 목적이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70항 다).
31. 하느님 백성에 관한 공의회의 교회론의 맥락에서, 친교의 개념은 성찬례 거행 안에 그 원천과 절정이 있는 교회의 신비와 사명의 심오한 실체를 표현한다. 친교의 개념은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결합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의 고유한 특성을 가리킨다. 교회는 ‘함께 걸어가는’ 데에서, 회중의 모임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자신이 친교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현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항).
32. 시노달리타스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을 지향한다. 복음화는 “교회 본연의 사명 ……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이다”(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4항). 모든 지역 교회와 온 교회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세례를 베풀고 성찬례와 고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구체적으로 응답한다(마태 28,19-20; 마르 16,15-16 참조). 모든 은사와 직무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와 일치의 “볼 수 있는 성사”(교회 헌장 9항)가 되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할 수 있게 한다. 시노달리타스와 사명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명은 시노달리타스를 일깨우고 시노달리타스는 사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33. 목자들의 권위는 “몸 전체의 건설을 위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7항)이다. 이 선물은 성품성사와 연결되어 있다. 성품성사는 이 성사를 받는 이들이 머리이시고 목자이시며 종이신 그리스도를 닮게 해 주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섬기게 하여 복음 선포의 사도성을 수호하고 모든 차원에서 교회 친교를 증진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교계 직무 자체를 이해하는 가장 적합한 해석의 틀”(프란치스코, 주교대의원회의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 2015.10.17.)을 제공하고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목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는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온 교회를 회개와 개혁으로 초대한다.
조화로서의 일치
34.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상호 관계 안에서 완전해진다. 인간이 참다운 상호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수록 인간의 정체성은 더욱 완전해진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상호 관계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53항).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 주신 새 계명인 상호 사랑에 힘입어 관계들이 꽃필 수 있는 공간으로 특징지어진다. 점점 더 개인주의적인 문화와 사회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교회 헌장 4항)인 교회는 삼위일체에 기반하는 관계들의 힘을 증언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성소, 연령, 성별, 직업, 사회적 조건과 소속감의 차이는 모든 사람에게 인격 성숙에 꼭 필요한 타자성을 마주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35. 공의회와 함께 “가정 교회”(교회 헌장 11항)라 부를 수 있는 가정 안에서, 성격과 연령과 역할의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이 지니는 풍요로움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가정들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중요한 실천들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특권적 자리가 된다. 가정들은 분열과 고통을 겪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이 사랑, 신뢰, 용서, 화해, 이해라는 선물을 서로 교환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로 남아 있다. 우리가 동일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고, 서로 도움을 주도록 창조되었으며, 경청받을 필요가 있고 경청할 수 있으며,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고, 사랑 어린 권위를 받아들이고 행사하며, 우리 활동에 대하여 공동 책임을 지고 그 책임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음을 배우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가정은 ‘우리’의 관계를 통하여 사람들을 인간답게 만드는 동시에 각자의 정당한 다름을 장려한다”(프란치스코, 교황청립 사회학술원 총회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2022.4.29.).
36. 시노드 과정을 통하여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 안에 매우 다양한 은사와 직무를 끊임없이 북돋워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에도 지체들이 서로 다르고 그 직무가 서로 다른 것이다.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다. 그 성령께서 당신의 풍요와 직무의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선물을 교회에 유익하도록 나누어 주신다(1코린 12,11 참조)”(교회 헌장 7항). 마찬가지로,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참여와 분화된 공동 책임 행사의 가능성을 넓히고자 하는 열망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교회 쇄신의 이 여정에 하느님 백성의 많은 구성원이 참여하지 못한 것은 슬픔을 자아내었다. 또한 교회 내 여러 곳에서 남녀 간 관계, 세대 간 관계,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 조건을 지닌 개인과 집단 간 관계를 온전히 풍성하게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슬픔이 표명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난한 이들과 배척당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37. 나아가 시노드 과정은 지역 교회들의 영적 유산과 그들의 경험을 표명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보편 교회는 지역 교회들 안에 그리고 지역 교회들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 보편성의 힘으로, “각 부분이 그 고유한 은혜를 다른 부분들과 온 교회에 가져다주어, 전체와 각 부분은 모든 것을 서로 나누며 일치 안에서 충만을 함께 도모하는 가운데에 자라게 된다”(교회 헌장 13항). 베드로의 후계자의 직무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교회 헌장 13항; 참조: 선교 교령 22항).
38. 온 교회는 언제나 민족과 언어, 고유한 예식과 규율과 신학적 영적 유산을 지닌 교회들, 공동선에 봉사하는 소명과 은사와 직무에서 다수성을 지녀 왔다. 이러한 다양성의 일치는 머릿돌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조화의 스승이신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다. 다양성 속의 일치는 교회의 보편성이 명확히 알려 주는 것이다. 이를 보여 주는 표지가, 시노드 과정을 통하여 그 부요함이 입증된 자치 교회들의 다수성이다. 시노드 총회는 교회들의 교회가 이루는 친교에 자양분이 되는 만남과 상호 이해와 은사 교환의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갈 것을 요청한다.
39. 시노달리타스 쇄신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인 하느님 나라의 당신 백성이 되라는 하느님의 보편적 부르심이 현재화되고 실현되는 자리로서의 맥락을 소중히 여기도록 장려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한 문화들은 그 다수성의 기초를 이루는 일치이자 그 문화들을 은사 교환의 전망으로 열어 주는 일치를 누리게 된다. “교회의 일치는 획일성이 아니라, 합법적인 다양성의 유기적인 융합이다”(「새 천년기」, 46항). 구원 메시지에 대한 표현의 다양성은, 그 메시지를 교회 생활과 그것이 표현되는 신학적 전례적 사목적 규율적 형태에 대한 단일한 이해로 축소해 버리지 않게 해 준다.
40. 맥락, 문화, 다양성과 그들의 상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로 성장하고 또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를 향하여 걸어가게 하는 열쇠이다. 우리는 보편 교회의 임무, 곧 공동의 세례에 힘입어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기도하신 제자들의 친교와 일치(요한 17,20-26 참조)를 함께 살아가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회 일치 여정을 지속하고 강화해 나가야 할 임무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시노드 총회는 지난 60년 동안 이루어진 교회 일치 관계들의 진전과 공동 신앙을 표명하는 대화들과 선언문들에 기뻐하고 감사한다. 형제 대표들의 참석으로 시노드 총회가 더 풍성하게 진행되었고, 교회 관행들 안에 교회 일치 여정의 결실을 수용해 온 덕분에, 우리는 완전한 친교를 향한 여정의 다음 단계들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41.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다른 종교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성금요일 전례에서 그들을 위하여 장엄 기도를 바치고, 더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그들과 협력하고 함께 싸우며, 세상을 괴롭히는 악에서 세상을 해방하여 주시도록 그들과 함께 유일하신 하느님께 간청드린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형적인 대화와 만남과 은사 교환은, “우정과 평화와 화합을 이룩하고 진리와 사랑의 정신으로 윤리적 영적 체험과 가치들을 나누는”(인도 주교회의, 현대의 도전들에 대한 인도 교회의 대응, 2016.3.9.;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271항) 것을 목표로 다른 종교 전통들과 맺는 관계들에 열려 있도록 요청받는다. 일부 지역에서는 타 종교인들과 형제적 관계를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는다. 시노드 총회는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그들의 노력을 지속해 나가도록 격려한다.
42. 종교와 문화의 다수성, 영적 신학적 전통의 다원성, 성령의 은사와 공동체 내 임무의 다채로움은 교회 내 연령과 성별과 사회적 소속의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편향된 성향을 인식하고 인정하여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고집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 다른 관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초대이다. 각 개인은 공동의 일을 완수하는 데에 특별하고도 필요불가결한 기여를 하는 존재이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관현악단의 이미지로 설명될 수 있다. 관현악단에서는 음악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하여 다양한 악기가 필요하고 각 악기 소리는 공동의 사명을 위하여 구별되면서도 고유한 음색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로써 화합 그 자체이신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화합이 드러난다.(성 바실리오, 「시편 주해」[In Psalmos] 29,1; 「성령론」[De Spiritu Sancto] XVI, 38 참조).
시노드 영성
43. 시노달리타스는 무엇보다도 세례 받은 이들의 일상생활과 교회 선교의 모든 측면에 스며드는 영적 기질이다. 시노드 영성은 성령의 활동에서 생겨나고, 하느님 말씀의 경청과 묵상과 침묵과 마음의 회심을 필요로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번 시노드 정기 총회 제2회기 개막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확실한 인도자이시고,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모든 이와 만물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식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노드 영성은 또한 수덕, 겸손, 인내, 용서하고 용서받을 마음가짐을 요구한다.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성령께서 나누어 주신 다양한 선물과 임무를 감사와 겸손으로 받아들인다(1코린 12,4-5 참조). 야망이나 시기, 지배 또는 통제하려는 욕망 없이 그렇게 하며,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필리 2,7)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기른다. 우리는 교회의 일상생활이 다원성 안에서 일치와 조화로 특징지어질 때 그 열매를 인식한다. 그 누구도 참된 영성의 길을 혼자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영적 양성과 지도를 포함한 동반과 지원이 필요하다.
44.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쇄신은 오직 은총의 우선성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하다.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깊이가 부족하면 시노달리타스는 조직 운용의 방편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개인적인 영적 체험의 열매를 공동체적 과정으로 전환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어떻게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이자 형태가 되는지 더 깊이 경험하도록 부름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전망은 성전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을 길어 올리면서도, 그 형태들, 곧 참여에 열린 기도, 함께 경험하는 식별, 나눔에서 생겨나 봉사로 빛을 발하는 선교 에너지의 형태들을 쇄신하는 데 기여한다.
45. 성령 안에서의 대화는 한계점은 있지만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7)을 듣고 식별할 수 있게 하는 풍성한 도구이다. 그 실천은 기쁨과 놀라움과 감사를 불러일으켰고 개인과 집단과 교회를 변화시키는 쇄신의 여정으로 경험되었다. ‘대화’(conversazione)라는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dialogo) 이상의 무엇을 표현한다. 곧, 대화는 조화로운 방식으로 생각과 감정을 어우러지게 하여 공통의 활기 있는 세상을 만든다. 이러한 이유로 대화 안에는 회심이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에서 발견되는 인간학적 실재로서, 민족과 문화는 공동체를 위하여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고 결정하고자 모여 연대하는 실천을 통하여 단단히 결합된다. 은총은 이러한 인간적 경험을 완성으로 이끈다. 곧 ‘성령 안에서’ 대화한다는 것은 신앙의 빛 안에서, 그리고 성령께서 당신의 틀림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참으로 복음적인 분위기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으면서 나눔의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46. 시노드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특히 너무 많은 학대의 여파로 교회와 사회 안의 치유와 화해와 신뢰 회복의 필요성이 울려 퍼졌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맡겨진 존재라는 사실을 교회의 삶과 활동의 중심에 두도록 부름받았다. 이 심오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과오를 인정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신성한 의무가 된다. 이 길을 걷는 것은 정의의 행위이자 이 세상에서 하느님 백성의 선교 임무이며, 우리가 청하여야 하는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이 길을 계속 걸어 나가고자 하는 열망이 시노달리타스 쇄신의 결실이다.
사회적 예언으로서의 시노드
47. 겸손하게 실천된 시노달리타스 방식은 교회가 오늘날의 세상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 민족들 가운데 들어 올려질(이사 11,12 참조) 기준과 같다”(프란치스코, 주교대의원회의 제정 50주년 기념 연설, 2015.10.17.). 우리는 불평등의 증대, 전통적인 통치 모델에 대한 환멸의 심화, 민주주의의 기능에 대한 실망, 전제적이고 독재적인 경향의 증가, 인간과 창조 세계의 취약성을 고려하지 않는 시장 모델의 지배, 대화보다는 힘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유혹이 그 특징인 시대에 살고 있다. 진정한 시노달리타스 실천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배적 사고에 맞서 비판적 예언을 할 수 있는 문화를 발전시켜 현대 사회가 직면하여야 하는 많은 도전에 대한 답을 찾고 공동선을 건설하는 데 뚜렷한 기여를 할 수 있게 한다.
48.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관계를 살아가는 것은 구체적인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에 응답하는 사회적 증언이다. 이는, 교회에조차 가끔씩 침투했던 개인주의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고립 심화에 도전을 제기하고, 공동선을 위한 상호 돌봄과 상호 의존성과 공동 책임으로 우리를 부른다. 또한 사람들을 숨 막히게 만들고 자신의 고유한 발전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과도한 사회 공동체주의에 대한 도전도 제기한다. 모든 이,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 곧 시노달리타스 삶의 방식이 장려하는 그러한 마음은, 집중된 권력이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와 소수자 그리고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세상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시노달리타스와 통합 생태학은 모두 관계들의 관점을 취하고 유대들을 돌볼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을 살아가는 방식에서 서로 일치하고 보완한다.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요한 21,2-3).
49. 티베리아스 호수는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하여 배와 그물을 버렸다. 파스카 이후에 그들은 그 호수에서 다시 출발했다. 밤이 되자 호숫가에서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우리도 함께 가겠소.”라는 대화가 울려 퍼진다. 시노드 여정도 이러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베드로의 후계자의 초대를 받고 이를 수락하였고, 그와 함께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성찰하고, 고뇌하고, 대화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교회 구조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관계들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관계들
50. 시노드 여정 내내 세계 각지에서, 관계들을 북돋울 수 있는 교회를 바라는 요청이 있었다. 곧, 주님과 이루는 관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사회 집단들 사이의 관계, 종교 간 관계, 피조물과 이루는 관계를 증진하는 교회를 요청하였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도 물어봐 주었다는 놀라움과 공동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쁨을 표명하였고, 혼인과 관련된 상황,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 때문에 배제되거나 판단받는다고 느끼는 고통을 나누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보다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관계에 대한 열망은, 화합을 이루고 있는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관계의 복음적 특성이 하느님 백성이 부름받은 대로 역사 안에서 이루는 증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깊은 신앙의 인식과도 일치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은총으로 새로워진 관계들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작은 이에게 베푸는 환대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러므로 시노드 교회가 되려면 관계의 진정한 전환이 필요하다. 관계들의 돌봄은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나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이라는 것을 복음을 통하여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의 관계들이 연약함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부의 사랑, 성령의 친교를 드러내 보여줄 때, 우리는 삶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51. 우리는 복음서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회심의 이정표를 따라가며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복음서들은 “거룩한 땅에서 길을 가시며 만난 사람들의 소리를 항상 변함없이 들으셨던”(「대륙별 단계 작업 문서」, 11항) 예수님을 우리에게 전한다. 남자든 여자든, 유다인이든 이민족이든, 율법 학자이든 세리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거지든 앞 못보는 이든 나병 환자든 병자든, 예수님께서는 경청하지 않거나 대화를 시작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냥 보내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의 역사와 자유가 자리하는 곳에서 만나심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사람들의 필요와 믿음에 귀 기울이셨고, 거기에서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말씀과 몸짓이 흘러나와 관계 회복의 길을 열어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메시아이시다. 그분께서는 제자인 우리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요청하시며, 성령의 은총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분의 마음을 따라 우리 마음을 빚으신다. 오직 “마음만이 모든 진정한 유대를 가능하게 한다. 마음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는 개인주의의 파편화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 17항). 우리가 형제자매에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마다를 만나러 오시는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52. 관계들에서 회심의 요구는 분명히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관계의 역동성은 피조물인 우리의 조건에 새겨져 있다. 성의 다름은 인간 관계성의 바탕을 이룬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의 이러한 근원적 다름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이 다름은 세례의 품위에 비추어 다시 읽힌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7-28).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이자 생명의 원천인 이 다름을 그것이 표현되는 다양한 방식과 맥락 안에서 환영하고 존중하도록 부름받았다. 남녀의 동등한 품위와 상호성을 존중하는 관계들을 살아가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시노드 과정에서 모든 지역과 대륙의 여성들이 평신도든 축성 생활자든 거듭 표명한 고통과 괴로움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를 보여 준다.
맥락의 다양성 안에서
53. 주 예수님 안에서 관계들을 쇄신하라는 부르심은, 그분 제자들이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다양한 맥락들 안에서 울려 퍼진다. 이러한 맥락들은 각각 문화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반드시 고려하여야 하는 독특한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들에는 모두 방식은 다르지만 왜곡되고 때로는 복음의 논리에 반대되는 관계 논리를 나타내는 표지들이 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관계적 폐쇄성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죄의 실질적이고 고유한 구조로 굳어졌다(「사회적 관심」[Sollitudo Rei Socialis], 36항 참조). 특히 관계적 폐쇄성은 관계적 회심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가 직면하고 극복하여야 하는 장벽을 세우고 두려움을 조장한다.
54. 전쟁과 무력 충돌에서 그리고 정의로운 평화가 무력으로 달성될 수 있다는 착각에서 시작하여 이 세상을 괴롭히는 악들이 이러한 역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것은 모든 피조물,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이익을 위해서라면 마음대로 착취해도 된다는 신념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안에서도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다른 이들의 가능성에 비해 일부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등, 여러 많은 장벽이 세워진다. 이러한 장벽에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 인종 차별, 카스트에 따른 신분 구분, 장애인 차별, 소수자의 권리 침해, 이주민을 환대하지 않는 태도 등이 있다. 우리의 누이며 어머니인 땅과 맺는 관계조차도(「찬미받으소서」[Laudato si’], 1항 참조) 특히 가장 빈곤한 지역에서 민족 전체는 아니더라도 수많은 공동체의 삶과 어쩌면 온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가장 심하고 비극적인 폐쇄성은 인간 생명 자체에 대한 것으로, 심지어 태아를 비롯한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55. 이 세상을 괴롭히는 수많은 악은 교회 안에서도 나타난다. 다양하고 비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나는 여러 학대의 위기는 피해자와 생존자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흔히 오래 지속되는 고통을 떠안겼다. 교회는 성직자나 교회 직분을 맡은 이들이 가하는 성적 학대, 영적 학대, 경제적 남용, 제도적 착취, 권력 남용, 양심을 거스르는 학대의 피해자와 생존자의 목소리에 특별한 관심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여야 한다. 경청은 치유, 회개, 정의, 화해를 향한 여정의 기본 요소이다. 전 세계적으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고 사람들이 불신과 의혹 속에서 살도록 부추기는 시대에, 교회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용서를 구하며 피해자들을 돌보고 예방책을 마련하며 주님 안에서 상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56. 배척과 소외로 고통받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임으로써 교회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그들을 치유하실 수 있도록 이 상처받은 관계들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 자기 사명의 일부임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된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성사 ……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 헌장 1항)가 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봄으로써 성령께서 지구의 모든 곳, 모든 문화, 모든 인간 집단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 주셨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의 씨앗은, 건강한 관계들로 살아가고 상호 신뢰와 용서의 자질을 기르며 다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환대 공동체들을 이룩하며 사람들과 지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제를 증진하고 갈등에서 벗어나 화해하는 능력으로 열매 맺는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종교 자체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갈등의 대물림이 있다. 고통의 원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사이의 분열, 같은 세례를 받은 형제자매들 사이의 적개심이라는 추문이다. 관계적 회심의 표지 가운데 하나로 시노드 여정에 함께한 교회 일치 노력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희망의 문을 열어 준다.
사명을 위한 은사, 소명, 직무
57.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선물들이 복음의 증언과 선포의 관점에서 열매 맺게 하도록 부름받았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4-7).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세례 받은 모든 이는 저마다 고유한 소명과 생활 조건에 따라 함께 나누는 선물들로 부유해진다. 다양한 교회 소명들은 실제로 세례 때에 받은 단일한 부르심인 성덕과 사명에 대한 부르심을 다양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성령의 자유에 원천을 둔 은사의 다양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교회 헌장 32항 참조)와 다양한 장소와 문화에서의 사명(교회 헌장 12항 참조)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선물들은 이를 받고 수행하는 이들만의 소유물이 아니고 개인이나 특정 단체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이 선물들은 적절한 성소 사목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원의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58.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살아가고 일하는 맥락 안에서 사명의 필요성에 응답하고, 이로써 고유한 선물들을 부어 주시는 성령의 자유를 드러낸다.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 귀 기울일 때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하여 헌신하여야 하는 새로운 분야와 이를 위한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역동성 덕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역량에 따라 -가정, 여러 다른 생활 신분, 일자리, 직업, 시민적 또는 정치적 임무, 사회적 또는 환경적 임무, 디지털 환경 문화의 복음화처럼 복음의 영감을 받은 문화의 발전에서- 세상의 길들을 걸어가고 삶의 터전 안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으며, 성령의 선물들로 뒷받침받는다.
59.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말고 파견과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교회에 요청한다. 또한 공동체의 형제적 유대뿐만 아니라 말씀과 성찬의 빵으로 길러지기를 요청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헌신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복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활동임을 인정해 주도록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증언을 통하여 복음에 이끌린 사람들이 공동체의 동반을 받기를 요청한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에서는, 공동체들이 그들 목자의 인도 아래 사람들을 파견할 수 있고 파견받은 이들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들은 그들 안에서 전개되는 활동들과 그들 조직의 필요에만 집중하지 말고, 주로 신자들이 사회 안에서,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 수행하는 사명에 봉사하는 데에 전념할 것이다.
60. 세례의 힘으로 남성과 여성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동등한 품위를 누린다. 그러나 여성들은 교회 생활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의 은사와 소명과 위치를 더욱 온전히 인정받는 데에서 계속 장애물에 부딪히고 있고, 이는 공동 사명을 위한 봉사를 저해한다. 성경은 구원 역사에서 많은 여성의 중요한 역할을 증언한다. 부활을 처음 선포하는 임무는 한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맡겨졌다. 오순절 날 위층 방에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주님을 따르던 다른 많은 여인과 함께 계셨다. 관련 성경 구절들이 전례 독서집 안에 적절한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은 여성들의 중대한 공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을 구성하고, 종종 가정 안에서 신앙의 첫 증인이 된다. 또한 소공동체와 본당 생활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학교, 병원, 보호소를 운영하며, 화해와 인간 존엄성과 사회 정의의 증진을 위한 계획들에 앞장서고 있다. 여성들은 신학 연구에 기여하고, 교회 연계 기관들과 교구청과 교황청에서도 책임 있는 위치에 있다. 권위 있는 역할을 수행하거나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번 시노드 총회는, 여성의 역할과 관련하여 현행법으로 이미 규정하고 있는 모든 기회가 특히 아직 시행되지 않는 곳을 비롯하여 완전하게 이행되기를 촉구한다. 여성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다. 성령에게서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에게 부제직을 허용하는 문제도 여전히 열려 있다. 이에 관한 식별이 계속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시노드 총회는 또한 설교, 가르침, 교리 교육, 그리고 교회 공식 문서들의 초안 작성에 사용되는 언어와 이미지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고 여성 성인들, 신학자들, 신비가들의 공헌에 더 많은 자리를 부여할 것을 요청한다.
61.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린이는 힘든 성장 과정에서 동행이 필요하지만, 신자 공동체에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 사도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할 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기준으로 제시하셨다(마르 9,33-37 참조). 교회는 가치 있는 선교적 잠재력을 지닌 어린이들의 기여 없이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될 수 없다. 공동체에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사회의 모든 사람, 특히 정치와 교육에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어린이를 환영하고 돌볼 줄 모르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전쟁, 빈곤, 방치, 학대, 인신매매로 많은 어린이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고발할 용기와 연대의 노력이 필요한 부끄러운 걸림돌이다.
62. 젊은이들도 시노드적 교회 쇄신에 이바지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특히 형제애와 나눔의 가치에 민감하고,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들을 거부한다. 교회를 향한 젊은이들의 태도는 때로는 비판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흔히는 사회 불의에 맞서 싸우고 공동의 집을 돌보는 데에 헌신하는 환대 공동체를 위한 개인적 노력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2018년 세계주교시노드 정기 총회에서 젊은이들이 제기한 “일상에서 함께 걸어가자.”는 요청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젊은이들에게 배려와 인내심 있는 동반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젊은이들의 의견서 덕분에 부각된 제안인, “식별의 관점에서 젊은이들을 동반하여 주는 경험”에 대한 제안을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는 어른 교육자들과 함께 나누는 형제애의 삶,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함께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도적 헌신, 기도와 성사적 삶에 뿌리내린 영성의 봉헌을 포함한다(세계주교시노드 제15차 정기 총회 최종 문서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 161항 참조).
63. 우리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사명에 대한 공동 책임성을 증진하면서 장애인들의 사도적 능력을 인정한다.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스스로가 복음화의 능동적 주체로 부름받고 파견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가져다주는, 인류의 엄청난 풍요로움에서 비롯되는 기여를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 또한 때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 안에서도 온정주의적인 연민의 태도 때문에 그들이 겪는 고통, 소외, 차별의 경험을 알고 있다. 교회의 삶과 사명에 대한 그들의 참여를 장려하기 위하여, 장애에 관한 교회 연구소(Osservatorio ecclesiale della disabilità)의 설립을 제안한다.
64.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 성소 가운데 혼인 성소가 두드러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대로, “그리스도인 부부는 ……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 생활 신분과 영역에 고유한 은총을 받는다”(교회 헌장 11항). 혼인성사는 가정 생활과 교회 건설과 사회 안에서의 임무에 관한 특별한 사명을 부여한다. 특히 최근에 가정들은 가정 사목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 주체라는 인식이 커져 왔다. 따라서 가정들은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전념하는 교회 기관들의 도움을 받아서도 함께 만나고 관계망을 이룩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시노드 총회는, 혼인과 성 윤리에 관한 교회의 성전(聖傳)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의 원천으로 인식하고 이에 충실하기를 선택함으로써 고독하게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 대한 친밀감과 지지를 표명하였다.
65. 수 세기에 걸쳐 영적 선물들은 축성 생활의 다양한 표현들도 생겨나게 하였다. 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적 권고의 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하여 관상과 다양한 형태로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자신을 봉헌한 남녀의 삶 안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인정해 왔다. 축성 생활은 고유한 예언자적 목소리로 교회와 사회에 도전을 제기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수도 가족들은 개별 은총들과 공동 사명을 조화시키는 법을 익혀 나가면서 시노달리타스 삶과 공동체 식별의 숙련된 실천을 발전시켜 왔다. 축성 생활회, 사도 생활단, 재속 수도회는 협회, 운동 단체, 신생 공동체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시노달리타스가 성장하는 데에 특별한 공헌을 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축성 생활 공동체는 교회와 세상을 위하여 예언자적 역할을 하는 상호문화의 실험실이다. 이와 동시에, 시노달리타스는 지역 교회들의 목자들뿐만 아니라 축성 생활과 교회 단체들의 책임자들에게, 공동 사명을 위한 은사 교환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관계들을 강화하도록 초대하고 때로는 도전을 제기하기도 한다.
66. 사명은 세례 받은 모든 이를 포함한다. 평신도 남녀의 첫 번째 임무는 현세 실재에 복음의 정신을 침투시켜 그 실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교회 헌장 31.33항; 평신도 교령 5-7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의 독려에 힘입어(「주님의 성령」[Spiritus Domini], 2021.1.10. 참조), 시노드 과정은 지역 교회들에, 사명의 필요에 창의성과 용기를 가지고 응답하여, 은사들 가운데에서 직무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부 은사들을 식별하고 이 은사들에 적절한 기준과 도구와 절차를 갖추도록 촉구하였다. 모든 은사가 직무로 세워져야 하는 것도,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직무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모든 직무가 제정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은사가 직무로 세워지려면, 공동체가 진정한 사목적 필요성을 확인하고 목자는 공동체와 함께 새로운 직무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관하여 식별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 과정의 결실로, 관할 권위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에서는, 전례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성품성사가 필요하지 않은 더욱 많은 형태의 평신도 직무를 장려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직무들은 제정될 수도 제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사람들이 점점 더 쉽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시대에, 평신도 직무자들에게 활동 시간과 범위를 명확히 정하여 직무를 위임하는 방법에 관한 성찰도 시작하여야 한다.
67. 시노드 총회는 많은 교회 봉사 가운데에서 신학이 신앙의 이해와 식별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제공해 온 기여를 인정하였다. 신학자들은 하느님 백성이 계시를 통하여 밝혀진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고 사명을 위한 적절한 응답과 적합한 언어를 개발하도록 돕는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 안에서 “신학의 은사는 …… 특별한 봉사를 행하도록 부름받는다. 충실한 백성의 신앙 체험과 진리에 대한 묵상, 그리고 목자들의 설교와 더불어, 신학은 복음이 더욱 깊이 관통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다. 더욱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들이 그렇듯이 신학자의 직무도 개인적인 동시에 단체적이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75항). 특히 신학자의 직무가 교회 학술 기관들에서 교회법적 사명으로 위임받은 가르침의 형태로 수행될 때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시노달리타스는, 신학자들이 서로 함께 경청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많고도 다양한 요구와 기여들을 통합하는 능력을 육성하여, 시노달리타스 형태로 신학을 하게끔 요구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75항). 이러한 맥락에서, 적절한 제도적 형태를 통하여 목자들과 신학 연구 종사자들 사이의 대화를 장려하는 것이 시급하다. 시노드 총회는 신학 기관들이 지역 교회들 안에서 시노달리타스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며 양성에 동반하도록 하는 연구를 계속할 것을 요청한다.
화합에 봉사하는 성품 직무
68. 주교와 신부와 부제의 직무는 교회의 모든 직무와 마찬가지로 복음 선포와 교회 공동체의 건설에 봉사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성품 직무는 “이미 옛날부터 주교, 신부, 부제라고 불리는 이들이 여러 품계로 수행하고 있다”(교회 헌장 28항). 이러한 맥락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직의 성사성을 확언하고(교회 헌장 21항 참조), 사제직의 친교적 현실을 회복하며(교회 헌장 28항 참조), 라틴 교회 안에서 영구적인 부제직 수행을 복구할 길을 열었다(교회 헌장 29항 참조).
주교의 직무: 성령의 선물들을 일치 안에 모으기
69. 주교는 자신의 교회 안에서 이루는 일치의 가시적인 근원이자 온 교회와 이루는 친교의 끈으로서 한 교회를 다스릴 임무를 지닌다.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된다”(교회 헌장 21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 확언은 주교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와 맺는, 그리고 주교에게 맡겨져 그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도록 부름받은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주교 교령 11항)과 맺는 성사적 관계망 안에서 이해하게 해 준다. 주교품을 받은 사람은 홀로 수행해야 하는 특권과 임무를 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성령께서 개인과 공동체에 부어 주시는 선물들을 인식하고 식별하며 일치 안에서 모으는 은총과 임무를 받아, 자신과 함께 지역 교회 안에서 직무적 봉사의 공동 책임을 맡고 있는 신부들과 부제들과 함께 성사적 유대 안에서 일한다. 그럼으로써 주교는 교회의 친교를 돌보는 맥락 안에서 자신의 가장 고유하고 특별한 사명을 실행한다.
70. 주교 직무는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를 위하여, 말씀 선포 그리고 성찬례거행과 그 밖의 성사의 집전을 통하여 수행하는 봉사이다(교회 헌장 20항 참조). 그러한 까닭에 시노드 총회는 주교 선출에서 하느님 백성이 더 큰 목소리를 가지기를 바란다. 또한 주교 서품은 흔히 그러하듯 그의 출신 교구에서가 아니라 그가 목자로 지명받은 교구에서 이루어도록 그리고 그에 대한 축성 주례 주교들은 가능한 한 관구장을 비롯한 교회 관구 주교들 가운데서 뽑도록 권장한다. 그리하여 주교가 되는 사람은 자신이 임명받은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자기 직무를 맡음으로써 그 교회와 유대를 맺는다는 것이 더욱 잘 드러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교는 무엇보다 사목 방문 때에 신자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식별을 위하여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교회가 하느님의 가족임을 체험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주교가 지역 교회와 이루는 구성적 관계는 오늘날 명의 주교의 경우에 예컨대 교황 사절이나 교황청에서 봉직하는 이들의 경우에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 숙고해 나가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71. 주교들 또한 자기 직무 안에서 동반과 지원을 받아야 한다. 관구장 주교는 인접 교구 주교들 사이에 형제애를 증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지역 상황에서도 주교들에게 지속 양성을 제공할 필요성이 시노드 과정에서 부각되었다. 보좌 주교들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주교가 위임할 수 있는 임무를 확대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하느님 백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섬기게 되는 원로 주교들의 경험도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주교 역시 유혹에 노출되고 다른 모든 이처럼 도움이 필요한 약한 형제임을 기억하여 주교에 대한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높이지 않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주교를 이상화하여 바라보는 것은그의 세밀한 직무를 북돋는 것이 아니다. 주교의 직무는 오히려 하느님 백성 전체가 참으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는 데에서 도움을 받는다.
주교와 함께: 신부들과 부제들
72.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서 신부들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모든 이를 환영하며 경청하는 태도를 지니고 시노달리타스 양식에 개방되어 고유한 섬김을 실천하도록 부름받았다. 신부들은 “자기 주교와 더불어 한 사제단을 구성”(교회 헌장 28항)하고, 일치에 대한 봉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은사들을 식별하고 지역 교회를 동반하며 이끄는 데에서 그에게 협력한다. 신부들은 사제적 형제애를 살아가며 사목 봉사 안에서 함께 걸어가도록 부름받았다. 사제단에는 축성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의 회원인 신부들도 있으며 그들의 고유한 은사로 사제단을 풍요롭게 한다. 그들은, 독신이든 혼인생활자든 동방 자치 교회에서 온 신부들, 피데이 도눔(fidei domun) 선교 신부들, 그 밖의 나라 출신 신부들이 그러하듯, 지역 성직자들이 교회 전체라는 지평에 개방되도록 도와준다. 동시에 교구 신부들은 다른 형제들이 고유한 전통과 영적 풍요로움을 지닌 구체적인 교구의 역사에 포함되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사제단 안에서도 선교 사명을 위한 참된 은총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신부들 또한 동반과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특히 직무를 맡은 첫 단계와 약하고 취약해진 순간에 동반과 지원이 필요하다.
73. 하느님과 교회의 신비에 봉사하는 이들인(교회 헌장 41항 참조) 부제들은 “사제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 직무를 위하여”(교회 헌장 29항) 성품을 받았다. 부제들은 자선, 선포, 전례에 대한 봉사로 부제품을 수행하면서 그들이 놓인 온갖 사회적, 교회적 상황에서 선포된 복음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또한 온 교회 안에서, 모든 이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을 향한 인식과 봉사의 방식을 증진한다. 성전과 전례 기도, 사목 관행에서 드러나듯이 부제의 역할은 다양하다. 부제의 그러한 역할은 각 지역 교회의 필요에 따라, 특히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 안에서 모든 이가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일깨우고 지원하기 위하여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부제직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라틴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를 고유하고 영구적인 품계로 복구하였지만(교회 헌장 29항 참조), 여전히 모든 지역에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진행 중인 많은 체험의 입증에 기반해서도 더욱 심화되어야 하지만, 모든 이의 종이 되신 주 예수님을 따르는 종인 교회의 성숙에 이 직무가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더욱 아량을 발휘하여 종신 부제직의 증진을 미루어 두지 않도록 지역 교회에 이미 확고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심화는 사제 후보자들이 받는 부제품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성품 직무자들 사이의 협력
74. 시노드 과정에서 여러 차례, 기쁨과 책임과 헌신으로 자기 직책을 수행하는 주교, 신부, 부제에게 감사를 표현하였다. 목자들이 그들의 직무에서 직면하는 어려움, 무엇보다도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요구로 받는 위압감과 고립감, 외로움에 관한 어려움도 들었다. 시노드 체험은 주교, 신부, 부제가 직무 수행에서 공동 책임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직무 수행에는 하느님 백성의 또 다른 지체들의 협력도 요구된다. 임무와 책임의 더욱 명확한 분담과, 성품 직무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과 다른 이들에게 위임할 수 있고 또 위임해야 하는 것에 대한 더욱 용기 있는 식별이 영적으로 더욱 건강하고 사목적으로 더욱 활기 있는 각각의 품계 수행을 증진할 것이다. 분명 이러한 관점은, 결정 과정이 더욱 뚜렷한 시노달리타스 특징을 띨 수 있도록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한 권력 사용과,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것인 교회 권위에 대한 왜곡으로 이해되는 성직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성직주의는 무엇보다 교회 직무자의 성적 학대, 재정 남용, 양심과 권력의 남용으로 표현된다. “사제 스스로 또는 평신도들이 양산하는 성직주의는 교회의 몸 안에 분열을 일으키고, 오늘날 우리가 규탄하는 수많은 악을 지속시키고 부추기고 조장한다”(프란치스코,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서한, 2018.8.20.).
사명을 위하여 함께
75. 교회는 공동체와 사명의 요구에 응답하여 교회 역사의 흐름 안에서 성품 직무와는 구분되는 몇몇 직무들을 탄생시켰다. 은사들이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를 이끌 책임을 맡은 이들에게 공적으로 인정받고 사명에 봉사하도록 고정적으로 배치될 때에 이러한 직무의 형태를 띤다. 일부 직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더욱 구체적으로 지향한다. 특히 제정 직무들이 중요하다. 제정 직무들은 주교가 적절한 식별과 양성을 거친 후보자들에게 평생 단 한 번의 고유한 예식을 통하여 수여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임무 위임이나 배정이 아니다. 직무의 수여는 한 사람을 형성하고 그가 교회의 삶과 사명에 참여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준성사이다. 라틴 교회에는 독서직과 시종직(「주님의 성령」[Spiritus Domini], 2021.1.10.), 그리고 교리 교사직(「오래된 직무」[Antiquum Ministerium], 2021.5.10.)이 있다. 그 직무들의 수행 기간과 방식은 합법적 권위의 위임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후보자들이 채워야 하는 개인적 조건을 규정하고 이러한 직무를 허용하기 위한 양성 과정을 마련하는 일은 주교회의의 소관이다.
76. 이러한 직무들과 더불어, 예식으로 세워지지는 않지만 관할 권위의 위임을 통하여 고정적으로 수행되는 직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소규모 교회 공동체를 조정하는 직무, 공동체 기도를 인도하는 직무, 자선 활동을 조직하는 직무 등이 있고, 이는 지역 공동체의 특징에 따라 매우 다양해진다. 하나의 실례로,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사제가 없는 공동체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교리 교사들이 늘 존재해 왔다. 규정된 예식이 없더라도, 효과적으로 인정을 받게 하고자 공동체 앞에서 하는 위임을 통해서 공적으로 임무를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 비정규 성체 분배 직무, 사제를 기다리며 하는 주일 거행의 인도, 일부 준성사의 집전 등 비정규 직무들도 있다. 라틴 교회법이나 동방 교회법 규범은 이미, 어떤 경우에는 평신도 남녀 신자들도 비정규 세례 집전자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라틴 교회법 규범에 따르면, 주교는 (성좌의 허가를 얻어) 평신도 남녀 신자들에게 혼인을 주례하도록 위임할 수 있다. 지역적 상황의 필요에 기초하여, 이와 같은 평신도 직무 수행의 기회를 확대하고 고정화할 가능성이 고려된다. 끝으로, 추가 조건이나 명시적인 인정이 필요하지 않은 자발적인 봉사들이 있다. 이러한 봉사는 모든 신자가 그들의 은사와 선물을 통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사명에 참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77. 협력과 분화된 공동 책임의 정신으로, 우리 시대의 사목적 필요에 응답하여 봉사와 직무의 추가적 형태도 탐구하면서 남녀 평신도들에게 더 많은 참여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상황에 적절하게 응답하여야 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체적인 필요가 특히 시노드 과정에서 부각된다.
가) 교회의 식별 과정과 모든 의사 결정 과정 단계(결정에 도달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남녀 평신도들의 더욱 폭넓은 참여.
나) 기존 규정을 준수하면서, 교구 안에서 그리고 신학교, 연구소, 신학 대학을 포함한 교회 기관 안에서 책임 있는 직책에 대한 남녀 평신도들의 접근성 확대.
다) 남녀 축성 생활자들의 삶과 은사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책임 있는 직책을 그들이 맡는 것에 대한 더 큰 인정과 더 확고한 지지.
라) 교회법 절차에서 역량 있는 남녀 평신도 재판관 수의 증가.
마) 교회와 교회 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존엄성과 권리 존중에 대한 효과적인 인식.
78. 시노드 과정은 경청이 특히 화해의 성사를 비롯한 성사 집전, 교리 교육, 양성과 사목적 동반 등 교회 삶의 모든 측면에 필수 구성 요소임을 새롭게 인식하였다. 이러한 틀에서, 시노드 총회는 다양한 방향성을 보여 주며, 경청과 동반의 직무를 제정하자는 제안에 주목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 직무가 공동체 안에서 경청과 동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언적 방법이 될 수 있기에 호의적 의견을 표명하였다. 경청과 동반은 모든 세례 받은 이의 임무로 특정 직무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단언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화의 필요성, 예를 들면 이 혹시라도 제정될 이 직무와 영적 동반, 사목 상담, 화해의 성사 거행 사이의 관계에 관한 심화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혹시라도 제정될 이 경청과 동반의 직무는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 떠나갔다가 되돌아온 사람, 진리를 찾으며 주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바라는 사람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따라서 여전히 이와 관련한 식별을 이어가야 한다. 이러한 필요를 크게 느끼는 지역들이 연구를 증진하고 식별을 위한 바탕으로 삼을 수 있는 모델 마련을 증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4-5).
79. 고기잡이는 소득이 없었고 이제 뭍으로 되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권위 있는 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는 제자들이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어떤 일을 하도록 초대하는 목소리, 그들이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보지 못하는 가능성을 일러주는 목소리이다.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시노드 과정에서 우리는 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기도와 형제적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사명(선교)의 길을 우리에게 가리켜 주시는 말씀께 응답하기 위하여 실천하여야 할 것은 교회적 식별, 결정 과정에 대한 관심, 그리고 자신의 일을 책임감 있게 설명하고 내려진 결정의 결과를 평가하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0. 이 세 가지 실천은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 결정 과정은 교회적 식별을 필요로 하고, 교회적 식별은 투명성과 책임감 있는 설명으로 뒷받침되며 신뢰의 분위기 안에서 하는 경청이 요구된다. 신뢰는 상호적이어야 한다. 결정을 내리는 이들은 하느님 백성을 신뢰하며 그들에게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 백성도 권위를 행사하는 이들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통합적 전망은, 이 실천들 하나하나가 또 다른 실천에 달려 있고 다른 실천들을 뒷받침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역량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교회적 식별에 기초한 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투명성과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의 문화를 체득하는 데에는 기술적으로만이 아니라 그 신학적, 성서적, 영성적 토대를 탐구할 수 있는 적절한 양성이 필요하다. 증언, 사명, 성화, 봉사를 위한 이러한 양성이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필요하고, 이를 통하여 공동 책임이 강조된다. 책임 있는 임무를 수행하거나 교회적 식별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의 양성은 특별한 형태를 띤다.
사명을 위한 교회적 식별
81. 교회의 사명을 지원하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관계들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사도 공동체가 첫 번째 시노드 사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무리 짓게 해 준 복음적 지혜의 발휘가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 하느님 백성이 그 사명에서 행사하는 식별이야말로 ‘교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 주신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한 14,26 참조), 모든 시대의 믿는 이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이끌어 주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을 통하여 ‘사도들에게서 전해져 오고 교회 안에서 발전하는 성전(聖傳)을’(계시 헌장 8항 참조) 계속 이어 가신다. 하느님 백성은 성령의 빛을 청하며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참여하고(교회 헌장 12항 참조), “현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사건과 요구와 염원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진정한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한다”(사목 헌장 11항). 이러한 식별은 주님께서 교회 안에서 나누어주시는 온갖 지혜의 선물을 활용하며 성령께서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전해 주신 ‘신앙 감각’에 뿌리 내리고 있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삶은 다시 한번 이러한 정신으로 이해되고 지향되어야 한다.
82. 교회적 식별은 조직을 운영하는 기술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영적 실천이다. 교회적 식별은 내적 자유, 겸손, 기도, 상호 신뢰, 새로움에 열린 자세, 하느님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마음을 요구한다. 이는 결코 개인이나 단체의 관점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개개인의 의견을 단순히 종합하는 것으로 결정되지도 않는다. 저마다 양심에 따라 발언하는 각각의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묵시 2,7)을 인식하고자 함께 노력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이 양심에 따라 나누는 의견들을 귀여겨듣는 데에 열려 있다. 교회적 식별은 관련된 모든 이의 기여가 수반되기에, 친교와 사명과 참여가 함께 실천되는 시노달리타스의 조건이며 탁월한 표현이기도 하다. 모든 이의 목소리를 더욱 경청할수록 식별은 훨씬 더 풍성해진다. 이러한 까닭에 식별 과정에 대한 폭넓은 참여의 증진이 필수적이고,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참여를 각별히 배려하여야 한다.
83.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은 모든 교회적 식별의 시작점이자 기준이다. 실제로 성경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셨음을, 예수님 안에서 모든 계시의 충만을 주시고(계시 헌장 2항 참조)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알려 주시기까지 하셨음을 증언한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전례 안에서 우리와 소통하신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전례 헌장 7항)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과 교회 교도권, 개인적 공동체적 성경 묵상, 대중 신심의 실천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인간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창조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통하여 여전히 당신 백성과 소통하신다. 피조물의 존재 그 자체가 창조주의 활동을 떠올리게 하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다. 끝으로, 하느님께서는 저마다의 양심 안에서도 말씀하신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다”(사목 헌장 16항). 교회적 식별은 양심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양심 형성, 그리고 신앙 감각의 성숙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시는 자리 그 어느 곳도 소홀히 하지 않게 된다.
84. 교회적 식별의 과정은 장소와 전통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다. 시노드 체험에 기초하여, 놓쳐서는 안 될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가) 식별 대상의 분명한 제시, 그 이해를 도울 적절한 정보와 도구의 활용.
나) 기도, 하느님 말씀의 경청, 주제에 대한 성찰로 준비하기에 좋은 시간.
다) 개인과 단체의 고유한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마음 자세와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노력.
라) 각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경청.
마) 갈등을 감추지도 최소한의 타협을 추구하지도 않으면서, 더욱더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루카 24,32 참조) 것을 통하여 생겨날 최대한 폭넓은 합의의 추구.
바) 합의에 도달하면, 이를 이끌어 온 사람이 모든 참여자에게 제시하여 이에 대한 인정 여부를 표명할 수 있게 하는 합의 과정의 공표.
식별에 기초하여, 바람직한 결정이 무르익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모든 이의 동의가 필요하고, 추후 검증과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동체 안에서 수용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85. 식별은 언제나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복합성과 개별성은 최대한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식별이 효과적으로 ‘교회적’이려면, 부분적 또는 근본주의적 접근을 피하면서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적절한 성경 주석과 같은 필요한 수단의 활용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 교부들, 성전, 권위 수준이 다양한 교도권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다양한 신학 분야의 기여와 인문학, 역사학, 사회학, 행정학의 도움도 필요하다. 이들의 기여가 없으면 식별이 이루어지는 맥락과 그 맥락의 전망을 진지하게 인식할 수 없다.
86. 교회 안에는 식별에 대한 매우 다양한 접근법과 잘 정립된 방법론이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성은 풍요로운 자산이다. 이 다양한 접근법을 여러 다른 맥락에 맞게 적절히 활용하면 유익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 공동 사명을 위하여, 각 사람의 고유함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을 해치는 일 없이 진심 어린 대화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교회들에서는 소공동체들과 본당들에서부터 먼저, 사명을 위한 교회적 식별의 문화를 널리 전하고 증진하는 양성의 기회를 특히 책임자 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동반자와 활성가의 양성에 힘쓰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흔히 이들은 식별 과정의 수행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의 구성
87.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는 “구성원들이 가지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공동체 전체가” 사명을 위한 “결정들을 내리고자 기도하고 경청하고 분석하고 대화하고 식별하며 조언하도록 소집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8항).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증진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결정을 내리는 과정들에 하느님 백성 전체가 최대한 폭넓게 참여하도록 북돋는 것이다. 참으로 시노달리타스가 교회를 특징짓는 생활 방식과 활동 방식(modus vivendi et operandi)을 정의한다면, 이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서, 곧 식별하고 합의에 도달하며 다양한 시노달리타스 구조와 제도의 실행을 통하여 결정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적인 실천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88. 주님께서 부르시고 파견하신 제자 공동체는 획일적이고 비정형화된 주체가 아니다. 제자 공동체는 수많은 다양한 지체로 이루어진 주님의 몸이며, 하느님 나라의 “싹과 시작”으로서 온 인류 가족 안에 이 나라가 생겨나도록 이바지하는 공동체적이고 역사적인 주체이다(교회 헌장 5항 참조). 교회 교부들은 이미 삼중의 ‘nihil sine’(없이는 아무것도), 곧 “주교 없이는 아무것도”(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트랄레스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Epistula ad Trallianos], 2.2.), “사제 평의회 없이는 아무것도, 백성의 합의 없이는 아무것도”(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서간집」[Epistulae] 14.4)라는 말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이 지니는 사명의 공동체적 본성에 관하여 성찰하였다. 이러한 ‘nihil sine’의 논리가 파괴되는 곳에서는 교회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사명이 방해를 받는다.
89. 분화된 공동 책임에 기초하여 참여를 증진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교회론적 준거의 틀 안에 자리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공동 결정을 위한 저마다의 능력과 재능을 소중히 여기면서 존중받아야 한다. 공동체 규모에 따라 어느 정도 뚜렷한 형태의 제도적인 중재가 필요하다. 현행법은 이미 다양한 차원에서 참여 기구들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 문서 뒷부분에서 이를 다룰 것이다.
90. 그들의 역할 증진을 위해서는 결정에 도달하는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성찰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식별과 자문과 협력의 공동 작업을 통한”(「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9항) 참여와 정교한 노력을 포함한다. 이는 이후 결정을 내리는 데에 정보를 주고 그 결정을 뒷받침한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관할 권위의 책임이다. 두 단계 사이에 경쟁이나 갈등은 없다. 오히려 이 두 과정은 그 결합을 통하여, 내려진 결정들이 당신의 교회에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최대한 일치하도록 보장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이러한 까닭에, 가능한 한 만장일치의 합의를 구하고 성령께 열려 있으며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회중과 그 주재자 사이의 상호성이 효과적이게 만드는 절차의 증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는, 관련 주체들의 역할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한번 명확히 드러나는 결정의 이행 단계와 평가 단계도 포함되어야 한다.
91. 현행법상 이미, 권위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문 과정을 거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 경우들이 있다. 사목적 권위는 자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할 의무가 있고, 따라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합의에 이른다면, 우월하며 적절히 표명되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 한(교회법 제127조 제2항 제2호; 동방 교회법 제934조 제2항 제3호 참조) 자문 결과를 물리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각각의 공동체 안에서 그러하듯이, 교회 안에서 권위의 행사는 독단적인 뜻을 강요하는 데에 있지 않다. 다양한 행사 방식을 통하여, 권위는 언제나 친교에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봉사한다. 진리의 수용을 통하여 그리고 진리의 수용을 향하여 성령께서는 다양한 시대와 맥락 안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요한 14,16 참조).
92.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안에서 주교와 주교단과 로마 주교의 의사 결정 책임은, 일치에 그리고 합법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에 봉사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교계 구조에 근거하기에(교회 헌장 13항 참조),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 자문 과정에서 올바른 식별의 결과로 드러난 방향성은, 특히 참여 기구들이 수행한 식별일 경우, 무시될 수 없다. 따라서 자문과 논의 사이에 어떠한 대립도 부적절하다. 교회 안에서 논의는 모든 사람의 도움으로 이루어지지만, 자기 직책에 힘입어 결정을 내리는 사목적 권위가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까닭에 교회법에 되풀이하여 나오는 ‘건의 투표권만’(tantum consultivum)이라는 표현은 초래될 수 있는 모호함을 없애기 위하여 재검토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문과 논의의 구분과 결합을 분명하게 만들고 다양한 역할을 통하여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책임을 밝히는, 시노달리타스 관점에서의 교회법 규범 개정이 적절해 보인다.
93. 다음과 같은 설명대로, 의사 결정 과정이 질서 있게 수행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참여자들이 명확한 책임을 맡는 것은 그 과정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핵심 요소들이다.
가) 결정의 책임이 있는 주체뿐만 아니라 자문과 논의의 대상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특수한 역량이나 사안과의 관련성 때문에 자문에 응하여야 할 이들을 규명하며, 모든 참여자가 자신의 합리적인 의견을 표명할 수 있도록 관련 정보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일은 특히 해당 권위에게 달려 있다.
나) 개인으로나 합의체적 기구의 구성원으로서 자문에 응하여 자기 의견을 표명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책임을 맡는다. 이는 학문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성실하고 정직한 의견을 제공할 책임, 받은 정보의 기밀을 엄수할 책임, 요점을 밝혀 명확한 의견을 표명할 책임이다. 이로써 사목 권위는 자신이 받은 의견과 다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그 자문을 어떻게 고려하였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다) 관할 권위가 자문 과정을 준수하고 결정의 동기를 분명히 표현한 뒤 그 결정을 공식화하면, 세례 받은 이들을 일치시키는 친교의 유대로 모든 이는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라도 이를 존중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다만, 평가 단계에도 정직하게 참여할 의무 는 보존된다. 법으로 규정된 방식으로 상급 권위에 상소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다.
94. 의사 결정 과정을 올바르고 단호하게 시노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은 참여의 관점에서 특히 교회법에서 규정한 제도적 중재를 통하여, 무엇보다 참여 기구들을 통하여 하느님 백성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다. 단시일 내 구체적인 변화가 없다면,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은 신뢰를 얻지 못할 것이며, 이는 시노드 여정에서 힘과 희망을 길어 올린 하느님 백성의 지체들을 멀어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실행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은 지역 교회들의 몫이다.
투명성, 책임감 있는 설명, 평가
95.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결정 과정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는 복음적 기준으로 북돋운 투명성의 정신으로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의 실천들이 수반되고 뒤따라야 한다.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직무에 대하여 책임감 있게 설명하는 것은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교회 전통에 속한다. 사도행전 11장에 이에 관한 본보기가 나온다. 베드로가 다른 민족 사람인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사도 11,2-3).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신이 한 행동의 이유를 책임감 있게 설명하였다.
96. 투명성에 관하여 특히, 투명성을 진실, 공정, 명료함, 정직, 청렴, 일관성, 불투명함과 위선과 모호함에 대한 거부, 단호함과 같은 일련의 용어와 연결하여 그 의미를 밝힐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마음이 깨끗한 이들의 복음적 참행복(마태 5,8 참조),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하신 명령, “우리는 부끄러워 숨겨 두어야 할 것들을 버렸으며, 간교하게 행동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어 하느님 면전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 앞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2코린 4,2)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을 되새겼다. 따라서 일련의 절차나 행정적 관리적 요건보다는 성경에 뿌리내린 근본적인 태도를 준거로 삼는다. 투명성은 국가 당국의 부당한 요구에 직면할 때라도, 올바른 복음적 의미에서의 비밀과 기밀의 준수, 개개인과 그들의 존엄성과 권리의 보호를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코 복음에 어긋나는 관행을 정당화할 수도 악에 맞서는 행동을 피하거나 무산시키는 구실이 될 수도 없다. 어떤 경우라도, 고해의 비밀에 관하여 “성사적 봉인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 어떤 인간적 힘도 그에 관한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고 요구할 수도 없다”(프란치스코, 내사원의 내적 법정에 관한 제30차 과정 참가자들에게 한 연설, 2019.3.29.).
97. 방금 언급한 관점에서, 투명성의 자세는, 관계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뢰와 신용의 보루가 된다. 신뢰가 무너지면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들이 그 영향을 받는다. 교회가 신뢰받는 곳에서는 투명성, 책임감 있는 설명, 평가의 실천들이 교회를 굳건히 하는 데에 기여하며, 교회가 신뢰를 회복하여야 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실천들이 더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는 미성년자와 취약한 이들의 보호에서 특히 중요하다.
98. 어떤 경우라도 이러한 실천들은 교회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그러한 실천들이 부족하다는 것은 성직주의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면서 동시에 성직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서 권위를 지닌 이들이, 마치 그들이 동떨어져 있거나 나머지 하느님 백성 위에 있기라도 한 듯이 그들의 행동과 결정을 책임감 있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암묵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성적 학대, 재정 남용, 그 밖의 종류의 남용과 관계될 때만 투명성과 책임감 있는 설명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 이는 목자들의 생활 양식, 사목 계획들, 복음화 방법들과도 연관된다. 또한, 예를 들어 교회 기관 내 노동 여건처럼 교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방식과도 연관된다.
99.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환대하는 교회가 되려면, 책임감 있는 설명이 모든 차원에서 일상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러나 권위 있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이와 관련하여 더 큰 책임이 있으며,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에게 책임감 있게 설명하도록 부름받았다. 장상에게 책임감 있게 설명하는 관행은 수 세기에 걸쳐 유지되어 온 반면에, 권위자가 공동체 앞으로 부름받아 책임감 있게 설명하는 차원은 회복될 필요가 있다. 축성 생활의 경험(총회, 교회법적 순시 등)으로 공고해진 제도와 절차는 이와 관련하여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
100.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직무적 책임이 어떻게 수행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평가하는 구조와 형태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평가는 개개인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평가는 오히려 직무적 책임을 맡은 이들의 행동에서 긍정적인 측면과 개선할 수 있는 분야들을 드러나게 하며, 교회가 경험으로 배우고 활동 계획을 조정하며 언제나 성령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돕는다. 또한 사명에 관한 결정들의 결과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해 준다.
101. 규제의 기준과 방법에 관하여 교회법 규범으로 이미 규정한 것을 준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 규범의 틀과 사회의 정당한 기대와 해당 분야 전문성의 효과적 활용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맥락에 맞게 투명성, 책임감 있는 설명, 평가의 효과적인 형태와 절차를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구축하는 것은 지역 교회들과 특히 교회 연합체들의 몫이다. 이러한 일에는 참여적인 평가 방법론을 우선적으로 채택하고,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의 과정에 더욱 밀접한 관련을 맺은 사람들 특히 평신도들의 전문성을 활용하며, 지역 시민 사회 안에 이미 존재하는 좋은 관행들을 식별하여 이를 교회적 맥락에 적용하여야 한다. 지역 차원에서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 과정을 어떻게 실행했는지는 사도좌 정기 방문 때에 제출하는 보고서에도 수록된다.
102. 특히 다양한 맥락에 적합한 형태로 최소한 다음의 사항들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가) 재무 평의회의 효과적인 역할.
나) 사목 기획과 재정 기획에 하느님 백성, 특히 가장 유능한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참여.
다) 교회와 교회 기관들의 자산과 재정 자원의 관리를 투명하게 해 주는, 가능하다면 외부 감사의 공증을 받은, 연간 재무제표의 (지역 사회에 적합하고 실제적인 접근성을 갖춘) 준비와 공표.
라) 사명 수행에 관한 연례 보고서의 준비와 공표. 보고서에는 보호(미성년자와 취약한 사람들의 보호)와 관련한 기획과, 평신도들이 권위 있는 자리에 접근하고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증진하는 기획에 관한 설명이 포함되고 분야별로 비율이 명시된다.
마) 교회 안에서 모든 직무와 직책 수행에 대한 정기적인 평가 절차.
이것이 그 자체가 목적인 관료주의적 임무가 아니라, 교회와 교회 기관의 소임이지만 흔히 사장되어 있는 여러 가치 있는 계획들을 더욱 가시적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문화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강력한 교육 수단으로 드러나는 소통의 노력임을 우리는 인식하여야 한다.
시노달리타스와 참여 기구들
103. 세례 받은 이들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참여뿐만 아니라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의 실천은 제도적 중재를 통해서, 무엇보다 교회법 규범이 이미 지역 교회 차원에서 규정하고 있는 참여 기구를 통해서 수행된다. 라틴 교회의 참여 기구들로는, 교구 대의원 회의(교회법 제466조 참조), 사제 평의회(교회법 제500조 제2항 참조), 교구 사목 평의회(교회법 제514조 제1항 참조), 본당 사목 평의회(교회법 제536조 참조), 교구와 본당의 재무 평의회(교회법 제493조와 제537항 참조)가 있다. 동방 가톨릭 교회의 참여 기구들로는, 교구 총회(동방 교회법 제235조 이하 참조), 교구 재무 평의회(동방 교회법 제262조 이하 참조), 사제 평의회(동방 교회법 제264조 참조), 교구 사목 평의회(동방 교회법 제272조 이하 참조), 본당 사목 평의회(동방 교회법 제295조 참조)가 있다. 위원은 교회 역할을 바탕으로 (은사, 직무, 체험, 또는 전문성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된 책임에 따라 구성된다. 이 기구들은 각각 토착화된 복음 선포, 고유한 환경에서의 공동체 사명,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인 세례 받은 이들의 증언을 위하여 필요한 식별에 참여한다. 또한 고정된 형태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를 위한 자리가 되어 고유한 활동을 평가하고 책임감 있게 설명하도록 한다. 참여 기구들은 시노드의 지침들을 신속하게 실행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들 가운데 하나이며, 신속한 실행은 감지할 수 있는 변화로 빠르게 이어진다.
104.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이러한 참여 기구들의 존재, 효율성, 허울이 아닌 실질적인 활동력에 토대를 두고 있다. 또한 교회법 조항이나 합법적 관습에 부합하는 그들의 역할과 이를 관장하는 회칙과 법규의 준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참여 기구들은 시노드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요구된 대로 의무 사항이 되어, 그저 형식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 상황에 적합한 형태로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105. 또한 시노드 작업 방법론의 채택에서 시작하여 이러한 참여 기구의 역할에 개입하는 것이 적절하다. 성령 안에서의 대화를 적절히 적용하여 준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구성원을 지명하는 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선거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 공동체나 지역 교회의 현실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시노드 자문을 실행한다. 권위자는 앞서 설명한 자문과 논의의 결합을 존중하면서 그 결과들에 기초하여 구성원을 임명한다. 사제 평의회 구성원이 가지는 권한과 유사하게, 교구와 본당의 사목 평의회의 구성원이 회의 의안에 포함될 주제를 제안할 권한을 가지도록 규정할 필요도 있다.
106. 마찬가지로, 여성, 젊은이, 가난이나 소외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더 폭넓은 참여를 장려하도록 이러한 참여 기구들의 구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기구들에는 그 공동체의 삶과 봉사를 조직하는 데에 관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탁월한 사도적 선교적 자질을 지니고 삶의 일상 현실과 자신의 사회적 맥락에서 신앙을 증거하는 데에 헌신하는 남녀들이 포함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참여 기구들이 수행하는 교회적 식별은, 더욱 열린 자세로 현실을 분석하는 역량과 다양한 시각들의 도움을 받게 된다. 다양한 상황에 따른 요구들에 입각하여, 시노드 총회의 방식과 유사하게 다른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또는 그 지역 안에 존재하는 타종교들의 대표가 참여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지역 교회와 지역 교회 연합체는 각각의 맥락에 알맞은 참여 기구 구성을 위한 몇 가지 기준들을 좀 더 쉽게 제시할 수 있다.
107. 시노드 총회는 교구 사목 평의회들은 물론 기초 공동체, 본당, 지구 차원의 사목 평의회들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처럼 이미 시행 중인 모범 사례와 개혁의 경험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자문을 가톨릭 교회 내부로만 제한하지 않고, 다른 교회들과 교회적 공동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지역 안에 존재하는 타종교들의 의견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문과 경청의 본보기로서 모든 차원에서 교회 회합들을 정기적으로 개최하여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다.
108. 시노드 총회는, 특히 지역 교회의 삶과 사명에 관한 선택의 문제에서 주교가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에 정기적으로 자문하는 기관으로, 특히 경청과 기도와 식별의 장소로 교구 시노드와 동방 교구 총회를 더욱 크게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교구 시노드 또한 책임감 있는 설명과 평가를 수행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주교는 재정 관리와 재산 외에도 다양한 부문에서의 사목 활동, 사목 계획의 실행, 교회 전체의 시노드 과정의 수용, 보호 문제에 관한 계획을 교구 시노드에서 보고한다. 따라서 각 지역 교회의 특성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도록, 교구 시노드와 동방 교구 총회가 너무 드물게 열리지 않고 정기적으로 개최되도록 규정하여 이 문제에 관한 교회법 조항을 강화할 것을 요청한다.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요한 21,8.11).
109. 부활하신 분의 말씀에 따라 던져진 그물은 풍성한 어획을 얻게 하였다. 모든 이가 그물을 끌어오는 데에 힘을 합치고, 베드로는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복음에서 고기잡이는 함께 펼치는 행위이다. 저마다 다르지만 다른 이들의 임무와 조화를 이루는 특정한 임무를 지닌다. 이것이 바로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이다. 그 교회는 친교 안에 하나 되게 하는 유대들과, 각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위한 자리들로 이루어진다.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순례자로 살아가는 곳에서 겪는 체험들이 변하는 이 시기에,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지는 은총의 교환과, 그들 서로 그리고 로마 주교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의 직무로 지탱되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유대의 관계망을 엮어 나가야 한다.
뿌리 내리고 있으나 순례자로 살아가는
110. 복음 선포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앙을 일깨워, 각 장소에서 하나인 교회가 설립되게 한다. 교회는 구체적인 지역, 곧 구원자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공동의 경험이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 뿌리내리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 교회가 가지는 지역 차원은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뿌리내리고 있는 신앙 표현들의 풍부한 다양성을 보전하고, 교회들의 친교는 유일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친교를 드러낸다. 따라서 시노달리타스 회심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 이루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 뿌리내린 우리의 모든 관계가 자리하고 있는 첫 번째 ‘장소’인 마음의 터를 넓히라고 모든 이를 초대한다. 이것이 모든 교회적 장소와 소속의 유대들을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개혁하기 위한 원천이며 조건이다. 사목 활동은 이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돌보는 데에만 국한될 수 없고,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증진하여야 한다.
111. 뿌리내림의 경험은, 장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고 있는 근본적인 사회문화적 변화를 맞닥뜨린다. 장소의 개념은 더 이상 단순히 지리적, 공간적 용어로 이해될 수 없고, 우리 시대에는 오히려 그 지역적 뿌리내림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역동적이고 유연한 관계망과 문화에 소속해 있다. 도시화는 이러한 변화의 근본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촌 인구의 대다수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대도시는 흔히 개개인이 그 안에서 섬처럼 살아가는, 역사도 정체성도 없는 인간 군집이다. 전통적인 지역적 유대의 의미가 바뀌면서 본당과 교구의 경계가 덜 분명해진다. 교회는 공동체 생활을 재구축하고 익명의 현실이 모습을 갖추게 하며 형제적 관계를 맺으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다. 이를 위하여, 여전히 적합성을 갖춘 구조들을 활용하는 것 외에도, 사목의 새로운 형태들을 탐구하고 구체적인 돌봄의 길을 찾는 선교적 창의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소외되고 배척된 장소가 그러하듯이 삶의 주변부인 농촌 현실은 간과하지 말고 특별한 사목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다.
112. 다양한 이유로 인간의 이동성이 증가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난민과 이주민은 종종 활기찬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의 신앙 실천을 통해서도 그들의 정착지를 다문화 지역이 되게 한다. 일부 난민과 이주민은 무엇보다 디지털 매체 덕분에 출신 국가와 밀접한 결속을 이어가며 새로운 국가와 결속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또 다른 이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채 지낸다. 이주민을 받아들인 장소의 주민들도 새로 유입된 이들을 환영하는 문제로 논란에 빠진다. 모든 이가 지리적, 문화적, 언어적 출신의 다양성을 접함으로써 받는 영향을 경험하고 다문화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이주 현상이 교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대표적인 사례는, 디아스포라에 있는 신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일부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상황이다. 다양한 영적, 문화적 근원을 존중하면서 그러한 교회들이 재건되려면, 그 신자들이 출신 국가와 유대를 지켜나갈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113. 젊은이들 사이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디지털 문화의 확산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그들의 믿음과 일상 활동, 커뮤니케이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네트워크가 주는 가능성이 관계와 연대와 경계를 탈바꿈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유례 없이 많이 접속하고 있지만, 종종 외로움과 소외를 느낀다. 게다가, 개인들을 조종하여 이념을 전파하고 공격적인 양극화를 초래하는 경제적, 정치적 이해당사자들이 소셜 미디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디지털 환경이 선교와 선포의 예언적 자리가 되도록 자원의 투입을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지역 교회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선교에 몸담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며 동반한다. 특히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디지털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단체는 소속감의 유대를 이룩하고, 만남과 대화를 북돋우며, 또래 학습을 장려하고, 교회 됨의 시노달리타스 방식을 개발하는 데에 관하여 성찰하도록 부름받았다. 접속의 네트워크는 교회의 시노달리타스 차원을 더욱 잘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114.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발전은 교회가 자신의 사명에 더욱 충실하기 위하여 교회의 ‘지역적’ 차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그 구조적 형태를 논의할 것을 요구한다. 구체적인 지리적, 문화적 상황에 뿌리내린다는 것의 가치를 깨달으면서 또한 ‘장소’를 인간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현실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거기에서 교회는 어우러지는 관계망을 통하여 고유의 성사성을 표현하고(교회 헌장 1항 참조) 고유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름받는다.
115. 장소와 공간의 관계는 ‘집’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성찰도 암시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방어해야 할 접근 불가능한 닫힌 공간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 집의 표상은 환영, 환대, 포용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창조 세계 자체가 우리 공동의 집이다. 그 안에서 한 인류 가족의 구성원들이 온갖 다른 피조물과 함께 살아간다. 성령께서 지켜 주시는 우리의 임무는, 교회가 하느님의 모든 아들딸을 위하여 환영의 집, 만남과 구원의 성사, 친교의 학교로 인식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이다.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희망의 순례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 표지로, 전통적인 순례 관행이 있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자리들 가운데 하나로는 대중 신심이 있다.
116. 지역 교회는 곧 교구로 이해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세례 받은 이들의 친교가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근본적인 자리이다. 지역 교회에서 공동체는 주교가 집전하는 성찬례 거행 안에 모인다. 각 지역 교회는 내적인 결속을 이루는 동시에 다른 지역 교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117. 역사적으로 생겨난 지역 교회의 기본 단위 가운데 하나가 본당이다.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만나는 본당 공동체는 관계와 환영, 식별과 선교를 위한 특권적 장소이다. 지역 관계의 개념과 이를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는 그 모습을 다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 특징은 선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공동체의 제시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세대, 직업, 지리적 출신, 사회 계층, 생활 여건의 사람들이 모인다. 선교의 새로운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의 이동성과 그 삶이 전개되는 ‘실존의 영역’을 고려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목 활동에 열릴 것을 요구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입문을 장려하고 동반하며 양성함으로써, 개개인이 삶의 다양한 단계에서 자신의 지상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당은 자기만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지향하고, 여러 방식으로 살아가며 일터에서 그리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활동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증언하는 많은 사람의 노력을 지원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소공동체나 기초 교회 공동체는 시노달리타스를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강력한 친밀함과 호혜의 관계를 꽃피울 수 있는 땅이 된다.
118. 지역에 뿌리내리는 동시에 국내외 차원에서 다양한 장소와 공간을 이어 주는 축성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 연합과 운동, 새로운 공동체의 역량에 감사를 전한다. 많은 개인과 사립 단체 활동과 더불어 그들의 활동은 흔히 더 많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곧, 병원, 교도소, 양로원, 이주민들과 미성년자들과 소외된 이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위한 쉼터, 젊은이들과 가정들의 만남의 자리인 교육과 양성 센터와 학교와 대학교, 공존의 새로운 형태를 상상하고 구축하는 곳인 문화와 정치와 온전한 인간 발전의 자리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공동 소명과 식별의 장소이자 온 교회와 관련되고 그 길을 안내하는 ‘저 너머’에 대한 예언의 장소인 수도원을 감사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다양성에 생기를 불어넣고 일치의 유대를 돌보는 일은 동방/서방 교구장 주교의 특별한 책임이다. 수도회는 시노달리타스의 역동성에 참여하여 지역 교회와 함께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활동하도록 부름받았다.
119. 또한 교회 관구와 국가별, 대륙별 교회 연합체처럼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중간’ 자리들을 활용하는 것도 교회가 우리 시대 장소들 안에서 더욱 의미 있게 현존하도록 이바지할 수 있다. 이동성의 증가와 오늘날의 상호 연결성은 교회들 사이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들고 “광범위한 사회 문화적 영역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곤 한다. 그러한 광범위한 영역에서 그리스도교 생활은 온갖 형태의 “그릇된 배타주의”를 몰아내고 “각 문화의 기질과 특성에 적응될 것이다”(선교 교령 22항).
은총들의 교환
120. 은사와 직무의 다양성 안에서, 그리고 교회 간 은총들의 교환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로서 서로 다른 장소에서 함께 걷는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인류의 여정을 성령의 숨결을 통하여 동반하고 지지하며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현존한다는 효과적인 표징이다. 은총들의 교환은 교회 생활의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지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하느님 백성으로 세워지고, 하나이고 보편된 교회의 품 안에서 지역 교회들과 그 연합들, 자치 교회들이 이루는 친교 안에서 역동적으로 표현된다. 이 교회는 “민족들의 역량과 자산과 관습을 좋은 것이라면 촉진하고 받아들이며, 받아들임으로써 실제로 정화하고 강화하며 승화시키며”(교회 헌장 13항) 그 사명을 수행한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1베드 4,10)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는 분명히 각 지역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 격변하고 긴박한 역사적 상황으로 오늘날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실천하고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는 이러한 은총 교환의 전형적이고 영감을 주는 사례는, 바로 라틴 전통의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 사이의 은총 교환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과 콩고 분지와 지중해와 같은 초국가적이고 다문화적인 거대한 지리적 영역에서 은총들의 교환과 공동선의 추구, 그리고 전 세계적인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한 조화로운 노력이 실현될 수 있는 새로움과 희망의 중대한 지평이 형성되고 있다.
121. 교회는 지역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의 보편적 일치 안에서 만남의 문화, 사회 정의, 소외 계층의 포용, 민족 간 형제애, 공동의 집 돌봄에 관한 예언을 순환시키고 촉진하는 관계망이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예언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각 교회는 온정주의나 복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존중하고 건강한 상호성을 증진하면서 연대의 정신으로 자산을 나누어야 한다. 아울러 필요한 경우, 기억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의 길을 걷고자 헌신해야 한다. 다양한 지역에 자리하는 지역 교회들 사이에 은총의 교환과 자원의 공유는 서로 연계된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유대를 형성하면서 교회의 일치를 촉진한다. 성직자가 부족한 교회에 도움을 주고자 오는 사제들은 단지 기능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들을 파견하는 교회와 받아들인 교회의 성장을 위한 자원이 되도록 보증할 조건들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아울러 경제적 지원이 복지주의로 변질되지 않고 복음적 연대를 촉진하며 투명하고 믿을만한 방식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122. 은총의 교환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충만하고 가시적인 일치를 향한 여정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는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인 사명의 신뢰성과 영향력을 촉진하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요한 17,21 참조)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표징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표현을 교회 일치의 대화에 적용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대화는 사고의 교환만이 아닙니다. 어느 면에서, 대화는 언제나 ‘은총의 교환’입니다”(「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28항). 그리스도교의 서로 다른 전통은, 바로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환경과 사회적 도전의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복음을 육화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수 세기에 걸쳐 성덕과 애덕, 영성과 신학, 사회적 문화적 연대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왔다. 이러한 소중한 자산들을 이제 보화로 삼을 때가 왔다. 곧 이 자산들을 우리만의 독점적 소유물로 여기지 말고, 아낌없이, 진심으로, 편견 없이, 주님께 감사하며, 서로에게 열린 마음으로 이를 서로에게 선물하여야 한다. 다른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성인들과 증인들의 모범은, 특히 순교자들의 경우, 우리의 전례력에 그들의 기념일을 삽입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다.
12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9년 2월 4일 아부다비에서 아흐메드 알타예브 알아즈하르의 대이맘과 함께 서명하신 「세계 평화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인간의 형제애’에 관한 공동 선언」(Document on Human Fraternity for World Peace and Living Together)은 “대화의 문화를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로, 상호 협력을 행동 강령으로, 상호 이해를 방식과 기준으로 채택한다.”는 의지를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역사 속에서 하느님 백성이 걸어가는 여정에서 공허한 열망이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는 삶의 다양한 장소에서 타 종교 신자들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복음의 기쁨을 거저 나누고, 그들 각자의 은총를 감사히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길을 걸어가고자 헌신한다. 이는 상호 교류와 도움(사목 헌장 40항 참조)의 정신으로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정의, 형제애, 평화 그리고 종교 간 대화를 함께 구축하려는 여정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종교와 관계없이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소규모 이웃 공동체들이 삶과 행동과 기도라는 삼중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장을 마련한다.
일치를 위한 유대: 주교회의들과 교회 회합들
124. 은총의 교환을 통한 친교의 지평은 교회 간 관계에 영감을 주는 기준이다. 이는 온 교회의 일치를 형성하는 유대에 대한 관심과, 고유한 역사와 전통 안에서 각 지역 교회가 살아가는 맥락과 관련된 특수성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결합시킨다. 시노드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교회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한다. 속도의 차이는 정당한 다양성의 표현으로 그리고 은총을 교환하고 서로 풍요로워지는 기회로 소중히 여겨질 수 있다. 이러한 공동의 지평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가 되도록 구체적인 구조와 실천을 식별하고, 확인하고, 장려할 것을 요청한다.
125. 주교회의는 교회 간 친교를 촉진하고 사목 활동의 필요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하고자 주교들의 단체성을 표현하고 실현한다. 주교회의는 교회들 사이에 유대를 형성하고 체험과 모범 사례를 공유하며,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의 표현을 다양한 문화에 적응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도구이다. 또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참여를 통하여 시노달리타스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노드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가) 주교회의의 신학적, 법률적 지위에 관한 성찰의 결과들을 수집한다.
나) 주교회의의 교리적, 규율적 관할권의 범위를 명확히 한다. 이 권한의 합의체적 행사는, 주교가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에서 지니는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고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위협하지도 않으면서도, 적절한 전례적, 교리 교육적, 규율적, 사목적, 신학적, 영적 표현을 규명함으로써 다양한 상황에 맞게 적절하고 토착화된 방식으로 하나의 신앙에 대한 참된 가르침을 증진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선교 교령 22항 참조).
다) 구체적인 개혁 방안을 찾고자, 주교회의의 실제 역할에 대한 경험, 주교들 간 관계와 주교들과 성좌의 관계에 대한 평가를 수행한다. 사도좌 정기 방문은 이러한 평가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라) 모든 교구가 교회 관구와 주교회의에 귀속되도록 한다(주교 교령 40항 참조).
마) 주교회의에서 내린 결정이, 주교들 자신의 교구와 관련하여, 바로 그 결정에 참여한 각 주교에게 불러일으키는 교회적 유대를 명확히 한다.
126. 시노드 과정에서 2023년 초에 열린 7개 대륙별 회의는 중요한 새로움을 드러냈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더 근본적인 적응”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 “모든 광범위한 사회 문화적 영역”(선교 교령 22항)의 가치에 대한 공의회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방식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유산이다.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더욱 발전하기 위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려면, 대륙별 주교회의 연합회의 지위뿐만 아니라 대륙별 회의의 신학적, 교회법적 지위를 더욱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륙별 주교회의 연합회의 의장들은 이러한 경험이 이어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할 책임이 있다.
127. 지역과 국가와 대륙별 교회 회합에는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구성원들(주교들 포함)이 참석하여 주교들이 맡은 직무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결정들을 합의체 방식으로 내릴 수 있도록 식별한다. 이러한 체험은, 시노달리타스가 어떻게 교회의 사명과 관련된 의사 결정 과정에 모든 이(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와 몇몇 직무(주교단)의 참여를 구체적으로 결합되게 하는지 보여 준다. 이러한 식별에 다양한 맥락에 적합한 형태로 다른 그리스도인과 타 종교 대표와 공공 기관과 시민 사회 단체와 사회 전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대화하는 장이 포함될 수 있기를 제안한다.
128. 어떤 주교회의는 특별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으로 대륙별 회의나 초국가적 교회 기구에 참여하기 어렵다. 성좌는, 이러한 주교회의들이 다른 주교회의와 은총들을 교환하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그 정부와 대화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돕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29. “건실한 ‘분권화’”(「복음의 기쁨」, 16항)와 신앙의 효과적인 토착화를 이루려면 주교회의의 역할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관구 공의회든 전체 공의회든 개별 공의회의 제정 역시 새롭게 인식하여야 한다. 개별 공의회의 정기적인 개최는 교회 역사의 상당 부분 동안 의무가 되어 왔고, 개별 공의회는 현행 라틴 교회 법전에도 규정되어 있다(교회법 제439-446조 참조). 이러한 공의회는 정기적으로 소집되어야 한다. 성좌가 개별 공의회들이 내린 결론들의 시의적절한 발표를 위하여 이를 추인하는 절차를 개혁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정확한 기한을 명시하거나, (신앙, 도덕 또는 성사적 규율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순전히 사목적 또는 규율적 문제의 경우에는 암묵적인 동의와 동등한 법적 추론을 도입할 수 있다.
로마 주교의 봉사
130. 시노드 과정은 시노달리타스에 비추어 로마 주교의 직무 수행 방식을 다시 검토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시노달리타스는, 개별 교회와 전체 교회의 공동체적 차원(‘모든 사람’)과 단체적 차원(‘몇몇 사람’)과 개인적 차원(‘한 사람’)을 조화롭게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황의 베드로 직무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포함하는 공동체적 측면과 주교 직무의 단체적 차원과 마찬가지로 시노달리타스 역동성에 내재되어 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64항 참조).
131. 이에 따라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다음과 같은 선언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베드로 교좌의 수위권은 온전히 보존된다.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다스리는 베드로 교좌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교회 헌장 13항). 로마 주교는 교회 일치의 근원이며 토대(교회 헌장 23항 참조)로서 시노달리타스의 보증이 된다. 곧 교회를 시노드에 소집하여 이를 주재하고 그 결과를 승인하는 책임이 로마 주교에게 있다.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주교는, 시노드 과정이 일치와 증언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보증하면서 신앙과 도덕의 유산을 지키는 유일한 역할을 맡고 있다. 로마 주교와 더불어 주교단은 교회 전체를 기르고(교회 헌장 22-23항 참조) 모든 지역 교회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촉진하는 데에서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한다.
132. 로마 주교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의 보증으로서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수 세기에 걸친 신학적, 교회법적, 전례적, 영성적, 사목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 교회들의 정체성 보호를 보장한다. 동방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시노드적 논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총대주교좌와 상급 대주교좌 교회들의 주교 시노드(동방 교회법 제102조 이하; 제152조 참조), 관구 평의회(동방 교회법 제137조 참조), 주교 평의회(동방 교회법 제155조 제1항; 제164조 이하 참조), 그리고 다양한 자치 교회들의 주교 총회(동방 교회법 제322조 참조) 등이다. 로마 주교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는 자치 교회로서 동방 가톨릭 교회는 동방 교회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보존한다. 시노달리타스의 틀 안에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친교를 실천하는 방법을 심화하고자 함께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는 동방 가톨릭 교회와 교황청의 관계에서 조정 또한 수반된다. 라틴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의 관계는 은총들을 교환하고 협력하며 서로 풍요로워지는 특징을 지녀야 한다.
133. 이번 시노드 총회는 이러한 관계를 강화하려면 교황이 주재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 총대주교와 상급 대주교와 대주교 평의회를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시노달리타스의 표현이자, 친교와 전례적, 신학적, 교회법적 영성적 유산을 공유하도록 촉진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라틴 예법을 따르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많은 동방 교회 신자들은 정체성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려면, 라틴 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 간 협력을 최대한 강화할 수 있는 도구와 규범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시노드 총회는 라틴 교회와 동방 교회 주교들의 진실한 대화와 형제적 협력을 권고한다. 이는 고유 전례를 위한 사제가 부족한 동방 교회 신자들을 위한 더 나은 사목적 지원을 보증하고, 주교회의에 동방 교회 주교들이 정당한 자율성을 지니고 참여하도록 보장하기 위함이다. 끝으로, 총회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을 견고히 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특별 시노드를 소집하여 줄 것을 교황께 제안한다.
134. 베드로 직무의 수행 형태에 관한 시노달리타스 방식의 성찰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촉구하고 많은 주교회의들이 요청한 대로 “‘건실한 ‘분권화’”(「복음의 기쁨」, 16항)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Praedicate Evangelium)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주교들이 “‘스승’과 목자로서 ‘자기 고유 직무’를 수행하는 때에 그들이 잘 알고 있고 또한 교회의 일치된 교리와 규율과 친교를 건드리지 않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권한을 그들의 관할권에 맡기면서 늘 공동 책임으로 행동”하는 것을 수반한다. “공동 책임은 교회라는 구체적인 ‘친교의 신비’(mysterium communionis)의 열매이자 표현이다”(「복음을 선포하여라」, II. 교황청의 봉사를 위한 원칙과 기준, 2. ‘친교’ 안에서의 공동 책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최근 발표된 자의 교서 「일부 권한의 부여」(Competentias Quasdam Decernere, 2022.2.11.)의 노선을 따라 어떤 사안은 교황에게 유보되어야 하고(reservatio papalis), 어떤 사안은 소속 교회나 교회 연합의 주교들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지 신학적이고 교회법적인 연구를 통하여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친교의 교회적 역동성”에 근거하여 “보편 교회 규율의 일치를 보호하려는 목적의 법전 규정들과 관련된 일부 권한을 지역 교회와 지역 교회 제도의 집행권에”(「일부 권한의 부여」, 서문) 부여한 것이다. 더욱이, 교회법 규범의 입안을 위한 임무와 권한을 지닌 이는 시노달리타스 방법으로 수행하고, 교회적 식별의 결실로 이를 성숙시켜야 한다.
135.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교황청의 봉사를 시노달리타스와 선교의 방식으로 정립하였다. 또한 교황청은 “교황과 주교들 사이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과 주교들 각자의 본성에 고유한 방식에 따라 그 양편에 봉사한다”(「복음을 선포하여라」, I. 8항)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교황령은, 교황청 부서들이 서로 더욱 협력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지역 교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실행되어야 한다. 교황청 부서들은 중요한 규범들을 발표하기 전에 주교회의들의 자문과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주교회의에 상응하는 기구들의 자문을 시작하도록 권장된다. 앞서 언급한 투명성과 책임감 있는 설명의 논리에 따라 교황청의 업무를 정기적으로 평가하는 형태가 마련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관점에서 교황 사절들과도 관련될 수 있다. 사도좌 정기 방문은, 지역 교회 목자들이 로마 주교와 교황청 내 그의 가장 긴밀한 협력자들과 이루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많은 주교는 언제나 더욱 개방적인 교류와 상호 경청의 기회가 되도록 그 실현 형태를 재고하기를 바란다.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추기경단 구성원들의 다양한 출신지와 문화를 고려하면서 그들 사이의 상호 인식과 친교의 유대를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노달리타스가 베드로 직무에 대한 추기경단의 협력 방식과 정례, 비정례 추기경 회의의 단체적 식별에 영감을 주어야 한다.
136. 교회 전체의 차원에서 시노달리타스와 단체성을 실천하는 자리들 가운데 세계주교시노드가 단연 돋보인다. 교황령 「주교들의 친교」는 세계주교시노드를 일회적인 사건에서 교회의 과정으로 전환시켰다. 교회 전체를 향한 교황의 염려에 평의회 방식으로 참여하도록 소집된 주교들의 회합으로서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제정하신 이 시노드는 이제 단계별 과정의 형태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 주교단, 그리고 교황 사이의 관계를 구성하는 표현이자 도구이다. 거룩한 하느님 백성 전체, 하느님 백성의 한 부분을 맡은 주교들, 그리고 교회 일치의 근원인 로마 주교는 저마다 고유의 역할에 따라 시노드 과정에 실제로 온전히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는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모이는 시노드 총회에서 드러나며, 그 구성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보여 준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설명하였듯이, 이번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의 구성은 “우연한 사건 이상으로,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주교 직무 수행 방법을 표현한다”(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2회기 개막 연설, 2024.10.2.). 세계주교시노드는 주교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하느님 백성의 다른 구성원들의 참여 안에서 사명을 위하여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이로 인하여 시노드 정신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교회에서 주교의 권위 행사를 맡도록 부름받은 형태”(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 총회 제2회기 개막 연설)를 보았고 앞으로도 보게 될 것이다. 세계주교시노드의 이러한 정체성을 심화하면서 시노드 과정과 총회에서 모든 사람(거룩한 하느님 백성)의 참여, 몇몇 사람(주교단)의 직무, 그리고 한 사람(베드로의 후계자)의 주재 사이의 조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실현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137. 2021-2024년 시노드의 가장 중요한 결실 중 하나는, 교회 일치적 움직임이 강렬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새로운 상황에 개방적인 수위권 행사 방식”(「하나 되게 하소서」, 95항)을 찾아야 할 필요성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근본적인 도전 과제이다. 시노드는,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가 최근에 더 심화된 연구를 위한 통찰력을 제시하는 「로마 주교: 교회 일치 대화 안에서 그리고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에 대한 응답으로서 수위권과 시노달리타스」(The Bishop of Rome: Primacy and Synodality in Ecumenical Dialogues and Responses to the Encyclical Ut Unum Sint)라는 문서를 발표한 데 대하여 기뻐한다. 이 문서는, 그리스도인 일치의 증진이 로마 주교 직무의 본질적인 측면이며, 교회 일치의 여정을 통하여 이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문서는, 수위권에 관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적 정의들에 대한 재독해나 공식적인 논평, 교황의 다양한 책임들에 대한 명확한 구분, 시노달리타스의 증진, 그리고 친교의 교회론에 기초한 일치의 모델 추구 등의 구체적인 제안들을 담고 있으며, 이는 교회 일치의 여정을 위한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시노드 총회는, 이 문서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명백하게 함께’ 협력하여 ‘서로가 인정하는 사랑의 봉사’(「하나 되게 하소서」, 95항 참조)로서 로마 주교의 일치에 대한 직무 수행에 관하여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를 바란다.
138. 다른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서 온 형제 대표들의 시노드 총회 참여가 나타내는 풍요로움은 동서방 교회 일치 당사자들의 시노달리타스 실천 방식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교회 일치 대화는 시노달리타스와 교회 일치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는 교회 일치 시노드 거행과 같은 공동의 시급한 관심사들에 대한 자문과 식별의 형태를 포함하여 교회 일치적인 시노달리타스 관행을 그려보게끔 우리를 이끈다. 또한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서로 책임을 지도록 초대한다. 이러한 가능성의 뿌리에는 우리가 하나인 세례로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있다. 하나인 세례에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 그리고 친교와 참여와 사명의 역동성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139. 2025년 희년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일치시키는 신앙 고백(신경)이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정식화된 첫 번째 보편(세계) 공의회의 기념일도 맞이한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1700주년의 준비와 기념은 그리스도 신앙을 심화하고 함께 고백하며, 모든 전통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시노달리타스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2025년에 하느님의 섭리로 같은 날에 맞이할 주님 부활 대축일을 공동의 날로 기념하기 위한 대담한 계획을 시작하여 온 세상의 생명이시며 구원이신 주님을 선포하는 선교적 힘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1-22).
140. 파스카 저녁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구원의 선물로 제자들에게 주시며 당신 사명에 그들을 참여시키신다. 그분의 평화는 존재의 충만이며 하느님과 형제자매들과 피조물과의 화합이다. 이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섬세한 몸짓은 하느님께서 한 처음에 하셨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위층 방에서 성령의 숨결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곧, 선교하는 제자들의 백성이 탄생한다.
141.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모든 이에게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고 시노달리타스 실천을 통하여 성장하려면 적절한 양성이 필요하다. 곧,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느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고 기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도록 하여야 한다. 사실 시노달리타스는 소명과 선교에 대한 깊은 인식을 의미하며, 교회적 관계에서 새로워진 방식, 참여의 새로운 역동과 교회적 식별, 평가하는 문화의 원천이다. 이는 목표 지향적인 양성 과정의 동반 없이는 시작될 수 없다. 교회의 시노달리타스 방식에 대한 양성은, 세례로 받은 은총들이 모두의 선익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탈렌트들이라는 인식을 고취시킬 것이다. 이 탈렌트들은 숨기거나 사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을 수 없다.
142. 선교하는 제자들의 양성은 그리스도교 입문에서 시작하고 그 안에 뿌리를 둔다.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에서 우리를 주님과의 관계와 교회의 친교 안으로 안내하는 데 기여한 많은 사람, 단체 또는 작은 공동체를 만난다. 곧, 부모와 가족, 대부모, 교리 교사와 교육자, 전례 봉사자와 자선 활동가, 부제, 신부, 주교와 만난다. 때로는 그리스도교 입문 과정을 마친 뒤에 공동체와의 유대가 약해지고 양성이 소홀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주님의 선교하는 제자들이 된다는 것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이는 지속적인 회심과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기까지”(에페 4,13) 사랑 안에서 키워지고 성령의 선물들에 마음을 열어 살아 있고 기쁜 신앙을 증거하여야 한다. 그러하기에 주일 성찬례 거행이 그리스도인을 양성한다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교육이 충만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동화된다는 것입니다. ……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나는 간절히 바랐다」[Desiderio Desideravi], 41항). 많은 신자에게 주일 성체성사는 교회와의 유일한 접촉이다. 따라서 강론과 모든 이의 “능동적인 참여”(전례 헌장 14항)와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최선의 방식으로 이 성사를 거행하고자 하는 것은 시노달리타스를 위하여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사에서 사실 시노달리타스는 우리 노력의 결과이기 전에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곧 한 사람의 주재 아래, 몇몇 사람의 직무 덕분에,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말씀과 빵이 함께 차려진 이중의 식탁이다. 시노달리타스가 지닌 세 개의 축인 친교와 사명과 참여의 선물은 모든 성체성사 안에서 실현되고 새로워진다.
143. 시노드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매우 강력하게 부각된 요청 가운데 하나는, 통합적이고 지속적이며 함께하는 양성의 필요성이다. 양성은 단지 이론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개방성과 만남, 나눔과 협력, 공동체적 성찰과 식별, 구체적인 체험의 신학적 이해 역량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하기에 양성은 지성적, 정서적, 관계적, 영성적 측면 등 전인적으로 다루어야 하고, 적절히 동반된 구체적인 체험이 포함되어야 한다. 아울러 남녀 평신도와 축성 생활자, 수품 직무자와 수품 직무 후보자가 상호 이해와 존중, 상호 협력의 능력을 기르게 해 주는, 함께 하는 양성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말로 전하는 바를 삶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적합하고 유능한 양성자들의 존재가 요청된다. 그래야 양성이 참으로 창조적이며 변화의 힘을 지닐 수 있다. 또한 교육학이 성인 학습 과정을 포함하여 개인과 공동체를 동반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 목표를 잘 설정한 과정을 준비하는 데 기여하는 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양성자들의 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144. 교회는 이미 선교하는 제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많은 장소와 자원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는 가정, 소공동체, 본당, 교회 단체, 신학교, 수도 공동체, 교육 기관은 물론, 소외된 이들과 함께 봉사하고 일하는 장소 그리고 선교와 자원봉사 체험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는,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흔히 상호작용하는 만남을 통하여 제자 직무를 교육하고 증언에 동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 준다. 아울러 대중 신심은 하느님 백성 전체를 양성하는 여정에서 교회의 소중한 보화이다. 교회 안에서 누구도 단순히 양성의 대상이 아니다. 곧 모든 이는 양성의 능동적인 주체로서 다른 이에게 내어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145. 시노달리타스의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양성을 위한 실천들 가운데 교리 교육에 특히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교리 교육이 그리스도교 입문 과정에 포함될 뿐만 아니라, 더욱 ‘밖으로 나가는’ 그리고 밖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자비의 표징 안에서 교리 교육을 실행하고 저마다의 체험에 이를 접목시킬 줄 안다.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를 참조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존재론적 주변부에 이르기까지 이를 전한다. 이렇게 하여 교리 교육은 우리 시대의 남성과 여성과의 ‘대화의 실험실’이 되어(새복음화촉진평의회, 「교리 교육 지침」[Direttorio per la Catechesi], 54항 참조) 그 의미를 추구하도록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교리 교사들은 많은 교회에서 동반과 양성을 위한 근본적인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또 다른 교회들에서는 그들의 봉사가, 시노달리타스와 모순되는 위임의 논리에서 벗어나 공동체로부터 더욱 존중받고 지원받아야 한다. 이주 현상의 규모를 고려하면, 교리 교육은 출신 국가와 환대 국가의 교회들 사이의 상호 이해를 촉진하는 데 중요하다.
146.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정한 사목 환경과 자원으로서뿐 아니라 학교, 직업 교육 기관, 대학교, 사회적 정치적 참여 교육, 운동과 음악과 예술의 세계 등 수많은 교육 기관에 존재한다. 매우 다른 관행과 전통을 형성하는 문화적 맥락의 다양성에도, 가톨릭 교육 기관들은 다른 교회적 환경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과 흔히 만난다. 시노달리타스 실천에서 영감을 받은 기관들은 우정과 참여의 관계를 형성하는 실험실이 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삶의 증거와 권한과 교육 구성은 주로 평신도가 주도하고 가정들이 우선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는 신앙과 문화 간 대화와 가치에 대한 윤리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충만한 삶의 상징인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양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때, 개인주의와 경쟁에 흔히 영향을 받는 지배적인 모델에 대한 대안을 촉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예언자적인 역할 또한 수행할 수 있다. 어떤 맥락에서는 이러한 학교들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기도 하다. 문화 간, 종교 간 대화에서 영감을 받은 교육 활동은 인간 증진의 한 형태로 다른 종교 전통을 가진 이들에게서 존중받는다.
147. 세례 받은 모든 이를 위하여 시노드 정신으로 함께하는 양성은 개별 직무와 다양한 삶의 형태에 필요한 특정한 양성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평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러한 양성은, 다양한 소명들 사이에서 은총들의 교환(친교)으로서, 수행하여야 하는 봉사의 관점(사명)에서, 그리고 분화된 공동 책임에 대한 참여와 교육 방식(참여)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시노드 과정에서 강력하게 제기된 이 요청은 사고방식을 전환하려는 노력과, 양성 환경과 과정의 새로운 정립을 요구하곤 한다. 편견과 고정 관념을 극복하면서,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주는 마음가짐이 특히 중요하다. 양성의 교회 일치적 차원은 이러한 의식의 전환을 촉진할 수밖에 없다.
148. 시노드 과정에서 수품 직무 후보자들의 식별과 양성 과정이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널리 표명되었다. 이는 여성의 중요한 참여, 공동체 일상생활에의 포용, 그리고 교회 안의 모든 이와 협력하여 교회적 식별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양성자들을 준비시키는 데에 과감하게 힘을 투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노드 총회는 「사제 양성 기본 지침」을 개정하여 시노드에서 성숙된 요구들을 반영하며 시노달리타스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 되게 할 것을 요청한다. 양성 과정은 후보자들에게 만민선교의 열정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주교들의 양성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성령의 선물들을 한데 모으고,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행사하는 사명을 언제나 더욱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시노달리타스 방식의 양성은 성품 직무로 나아가는 과정의 모든 측면에 교회 일치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149. 하느님 백성을 시노달리타스로 양성하는 데 시노드 과정에서 계속 강조한 몇 가지 특정 영역을 고려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영역은, 디지털 환경이 학습 과정, 집중력,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 대인관계 형성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이 있다. 디지털 문화는 우리 시대 문화 안에서 교회의 증언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원이자 새로운 선교의 장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계망 안에 존재하며, 그 내용이 이념적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디지털은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커다란 잠재력을 가졌지만, 또한 집단 따돌림, 허위 정보, 성적 착취와 중독 등을 통하여 피해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교회의 교육 기관은 청소년들과 성인들이 온라인상에서 안전하게 탐색할 수 있도록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150.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은 모든 교회 환경에서 보호 문화를 증진하여 미성년자와 취약한 이들에게 더욱더 안전한 공동체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미 교회는 학대를 예방하고 부적절한 행동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규정과 법적 절차를 구조적으로 마련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미성년자들과 취약한 성인들과 접촉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특정 교육을 제공하면서 계속되어야 한다. 이는 그들이 권위 있게 행동하고, 침묵 속에서 비극적 상황을 살고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피해자들을 환대하고 지원하는 일은 섬세하고 필수적인 임무로, 훌륭한 인간성이 요구되며 자격을 갖춘 이들의 도움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의 이웃이 되고자 구체적인 선택을 통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도우며 모든 이를 위한 다른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미성년자와 취약한 이들에게 더욱더 안전한 공동체를 마련하면서 온 세상에서 예방과 보호의 문화를 활성화하고 촉진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학대를 예방하려는 조치들이 있었지만, 미성년자와 취약한 성인과 일하는 이들에게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을 제공하면서 이러한 노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호 절차는 끊임없이 감독하고 평가해야 한다. 피해자들과 피해 생존자들은 매우 세심하게 환대받고 지원받아야 한다.
151. 교회의 사회 교리, 평화와 정의를 위한 헌신, 공동의 집 돌보기, 그리고 문화 간, 종교 간 대화에 관한 주제 역시 하느님 백성에게 널리 전파하여, 선교하는 제자들의 행동이 더욱 정의롭고 형제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생명과 인권의 수호, 사회의 올바른 질서, 노동의 존엄성과 공정하고 연대하는 경제, 통합적인 생태를 위한 노력은, 교회가 역사 안에서 살고 구현하도록 부름받은 복음화 사명의 일부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9.12-13).
152. 고기잡이 기적 이야기는 잔치로 끝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고 뭍으로 끌어올리라고 하시고, 식탁을 준비하여 그들에게 아침을 먹으라고 초대하신다. 배고픈 군중을 위하여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셨던 그때처럼 모든 이를 위한 빵과 물고기가 있다. 무엇보다 그 어떤 물음도 필요 없이 너무도 분명하고 빛나는 그분 현존은 경이롭고 넋을 잃게 만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을 저버리고 부인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친교의 장을 다시금 열어 주시고 미래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는 자비의 흔적을 제자들에게 영원히 새겨 주신다. 그러하기에 부활의 증인들은 자신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
153. 부활하신 주님의 잔치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시노드 총회의 작업에 불어넣은 상징이 성취된다.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을 위한 향연과 친교의 상징인, 주님께서 산 정상에서 준비하신 풍성하고 호화로운 잔치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사 25, 6-8 참조).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식탁은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 잔치의 표징이다. 그 충만함은 하늘에서 이루어질지라도 은총과 자비의 식탁이 이미 모든 이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고,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는 주님의 몸과 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길러지는 한편, 가난한 이, 가장 낮은 이, 소외된 이, 사랑을 알지 못하고 희망이 없는 이,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이를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교회는 그들을 기도 안에서 주님께 맡겨 드리고 성령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창의성과 담대함으로 그들을 만나려고 밖으로 나간다. 이렇게 교회의 시노달리타스는 사회적 예언이 되고, 정치와 경제를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세상과 은총들을 교환하면서 형제애와 평화를 믿는 모든 이들과 협력한다.
154. 우리는 시노드 과정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받고 선포해야 하는 구원이 관계를 통하여 전해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구원은 함께 살아가며 함께 증언하는 것이다. 역사는 전쟁과 권력 다툼과 수많은 불의와 억압으로 비참하게 얼룩져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진정한 관계와 참된 유대의 열망을 심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창조 세계 자체는 일치와 나눔, 서로 다른 삶의 형태 간 다양성과 어우러짐에 관하여 말한다. 모든 것은 조화에서 나오고 조화를 향해 나아가며, 심지어 악으로 짓밟힌 상처로 고통받을 때도 그렇다. 시노달리타스의 궁극적 의미는, 교회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 곧 세상에 자신을 내어주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쏟아부은 사랑의 조화를 전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우리의 소명과 은사와 직무가 서로 어우러져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걷고, 모든 이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하고자 만나러 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온 인류와 함께, 모든 피조물과 함께 구원하는 친교를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나눔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을 위하여 마련하신 생명의 잔치를 체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155. 길을 가리키고 인도하는 이(Odigitria)를 뜻하는 경이로운 칭호를 지니신 동정 마리아께 이번 시노드의 결실을 맡긴다. 위층 방에서 초기 공동체가 오순절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신 교회의 어머니시여, 함께 걸어가는 선교하는 제자들의 백성, 곧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가 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소서.
<원문: Documento Finale della Seconda Sessione della XVI Assemblea Generale Ordinaria del Sinodo dei Vescovi (2-27 ottobre 2024) “Per una Chiesa sinodale: comunione, partecipazione, missione”, 2024.10.26., 영어도 참조>
각 언어 : https://www.synod.va/en/news/final-document-of-the-xvi-assembly.html
차례
서론